김성일 목사 (빅토빌 예수마음교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불규칙한 상황들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오직 교회에 다니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학교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친구관계 등 신앙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주관이나 신념대로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행동해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편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민사회현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증세를 쉽게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예상을 뒤엎는 일들이 갑자기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행복하고 뜻 깊게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 세상이 비록 곤고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포기할 수 없으며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후7:1에서도 엡4:1-2에서도 골3:12-14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데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이 매우 힘겹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삶의 의욕이 있을 리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본문의 말씀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걸어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이며 어떻게 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전혀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우리 주변에 가득한 방황과 좌절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결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성도가 낙심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앞에 닥친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가 낙심하도록 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어려운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의 길로, 새로운 삶으로 들어서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불투명한 진로와 미래 속에서도 전진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보고 듣는 수많은 소식들 가운데에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들은 과연 얼마나 됩니까? 이 세대가 어떠합니까?
교회 안에서도 대충 즐기자와 놀자로 들떠 있으며 예배보다는 재미와 신나는 것만을 추구하려는 말초신경 자극적인 문화, 하나님을 거부하는 문화적 접근들이 판을 치는 이러한 문화와 생활 풍습과 삶의 자세에 함께 휩쓸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미래에 대해서 암담하게 생각한다면 그 신앙은 병든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전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원동력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방법을 모르는 사람, 목적지가 불분명한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전혀 다른 인생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막혔던 인생의 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12:1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은 하셨지만, 언제 어디로 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언제” 가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순간순간을 인도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히11:1절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는 말씀은 믿음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현실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의 거리가 가까운 사람을 큰 믿음의 사람이라 하고 그 거리가 먼 사람은 작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미래가 보이고 든든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미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요6:40)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살전4:3-7에서 말씀하시듯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이렇게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흠되는 것이 없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빌4:8-9)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이 세대 가운데서 분별하며 이루어 나가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대체 무엇일까요? 창12:4에서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창15:1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순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갈 길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은 불리하면 놓아버리지만 주님은 자신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극복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는 사람으로서 세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첫째, 믿는 자의 가장 두드러진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둘째, 믿음 생활에서 가장 힘든 때는 언제입니까? 셋째, 신자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위로부터 오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믿는 자의 가장 두드러진 삶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너무도 보편적인 얘기이긴 하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절대조건입니다(히11:6). 아무리 봉사하고 구제하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그 믿는 것이 그대로 삶에 실현되는 것입니다(히11:1).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언제입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방향만 제시하실 뿐 구체적 지시를 해주시지 않을 때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과 불신앙이 갈라지게 됩니다. 정말 멋진 믿음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고 나아갈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바로 `믿는 대로 되리라’(막11:24)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꿈을 주고 그것이 믿는 대로 실현되는 것, 이 얼마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믿음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놀라운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수많은 기적들을 눈으로 보며 사는 믿음의 참된 재미가 여러분과 제 삶에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