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셨네

(마태복음 28:1-10)

홍민기 목사 (호산나교회)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새벽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기독교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셔야만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을 붙잡고 부활의 능력과 신앙으로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도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사망과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려 우리의 주인 삼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며 책임져 주시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할 때에 우리의 인생이 변화될 줄 믿습니다.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6절)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던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서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유대의 관습을 따라 장례를 치렀습니다.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시신을 관에다 안치한 후 매장하는 형식이지만, 유대인들은 산허리를 뚫거나 자연동굴과 같은 곳에 시신을 놓아두는 문화입니다. 알려진 대로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굴에 계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시신을 관에 안치하기 때문에 수의를 입혀서 일곱 마디로 묶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관습은 시신의 몸통을 세마포로 감고, 머리 부분은 수건으로 감쌉니다. 몸과 머리를 감을 때 쓰인 천이 다릅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20:6-7).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면, 마치 허물이 벗겨진 것처럼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와 예수님의 머리를 싸놓았던 수건이 그대로 놓였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훔쳐갔다고도 하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두려워 그 옆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훔쳐갔다면 어떤 도둑이 세마포와 머리를 감싼 수건을 그대로 놓고 몸만 빼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저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부활의 증명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놀라운 부활의 증명은 사도들의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겁이 많고 두려워하고 떨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교하기에 이르는 제자들로 변화된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새벽미명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행하고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붙잡고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알고 계십니다. 다시 사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나그네 인생길 속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두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자신들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비난만했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진정 사랑해주었습니다.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새벽미명에 눈물도 뚝뚝 떨어지고, 속이 너무 상해 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일하게 그들을 사람대접 해주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사실이 몹시 슬펐습니다. ‘로마병사들이 무덤을 막고 있으면 어쩌지? 그래도 우리라도 가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부어드리자.’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앞을 막고 있던 큰 돌이 굴려져 있고, 그들은 텅 빈 무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며 그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에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하자 도마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도 한 예입니다. 무덤 앞의 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 무덤을 나오기 위해서 굴려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무덤의 돌은 소망 없이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며 터벅터벅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 두 여인을 위하여 굴려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온갖 아픔이 있습니다. 혹은 돌덩이 같은 짐을 가슴에 얹고 살기도 합니다. 도무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짐을 가슴에 얹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돌을 굴려주실 것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돌덩이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굴려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나오시기 위하여 돌이 굴려진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인생들을 향하여 빈 무덤을 보여주시려고 그 돌을 굴리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두 여인을 천사가 맞이하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고 갈릴리로 가셨으니 그리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두 여인은 기뻐 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8-9절).

7절에 천사는 갈릴리로 가 예수님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그리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그렇게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하냐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함께하고 싶어 하시고, 보고 싶어 하셨으면 갈릴리까지 가서 기다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여인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두 여인을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오늘 나에게도 달려오셔서 나를 만나주시는 분이시고, 소망 없는 나에게 오셔서 나를 붙잡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여인을 향해 달려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달려오십니다.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주시고,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을 닦아주시며, 아픔을 위로해주십니다. 어찌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이 하나님을 나누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 번째 ‘와야’ 합니다(6절). 오십시오. 어디로 와야 하겠습니까? 그 빈 무덤으로 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장소로 오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대일로 만나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보아야’합니다(6절). 무엇을 보아야할까요?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아야합니다. 그 빈 무덤을 보아야합니다. 그 빈 무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곳을 봐야합니다. 바로 나의 무덤입니다. 우리도 한계가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생을 살고 때가 되면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이 인생이 끝나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서야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세 번째는 ‘가야’합니다(7절). 어디로 가야할까요? 나의 가정과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고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답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빨리 가서 그의 제자에게 이르되’(7절)라고 했습니다. ‘이르되’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증거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을 증거하며 부활을 이 땅에 알리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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