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용 목사 (템피장로교회)
오늘 본문은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의도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희들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너희들은 대단하다. 중요하다. 특별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너희들은 소금처럼 이 땅에서 많은 역할을 감당하면서 해야 할 일이 많다. 내가 그 일들을 하게 해 주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러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위치, 특별한 사랑 그리고 특별한 계획까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이자 축복의 대명자였습니다.
성경에는 소금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민수기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소금이란 언약과 밀접한 개념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 의미는 좋든 싫든 변개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꾸지 않겠다, 늘 유효하다, 약속을 다 이루겠다”는 의미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번 소금은 영원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소금언약을 통한 소금의식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특별하다”는 의식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갖습니다.
유대인들이 소금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너희는 대단하다. 특별하다. 이런 특권과 자부심으로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의도로 예수님이 말씀하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번 소금이면, 유대인이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가? 그렇지 않는가?” 이것을 예수님이 소금이야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핵심일까요?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희는 소금이다. 맞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소금이 귀하고, 특별하고, 중요하고, 의미있다 하더라도 그 맛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쓸모없게 내다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소금의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끝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그의 말씀이 그들의 인생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소금으로 있지 말고 짠맛을 갖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짠맛을 내라는 것은 올바르게, 착하게, 덕스럽게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기독교를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인생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짠맛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짠맛은 자신을 바꾸고, 사람들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소금이라서 소금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짠맛을 내야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짠맛을 내면 소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금이 아닌 자도 소금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요? 소금 맛, 즉 짠맛을 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도 다 아브라함의 자손 즉,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면 소금이 아닌 자들이 소금이 되어지고 짜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핵심진리가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어떤 선행이나 구제로도 스스로 짜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소금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점점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 동화하다가 짠맛을 잃어버리고 버림을 당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금 그 자체이시다는 것을.... 예수님이 소금으로서 짠맛을 내시는 주체이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짠맛을 보여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만 가면 소금의 주체이신 그 분이 짜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소금으로 이 땅에 선택함을 받았지만 더 이상 소금 맛을 내지 않고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소금 맛, 짠맛을 내게 하여 버림받지 않게 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은혜란 소금으로 존재하는데서 짠맛이 나도록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은 맛이 없고 싱거우면 내 뱉고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맛을 못내는 소금을 그냥 내 뱉지 않고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그 맛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사람들은 피하지만 주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주십니다. 사람들은 포기하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바꾸어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소금의 짠맛을 내고 산다는 것은 은혜 맛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은혜 맛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직분과 직책에 만족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경력과 경험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과거의 좋은 기억과 추억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만일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거저 소금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소금됨도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짠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직분중심이 아니라 사명중심, 영향력 중심으로 살아야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소금으로서 만족하고 살라고 하더냐?” 짠맛을 내지 않으면 결국 너희는 버려지게 된다는 것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