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수 목사 (알칸사제자들교회)
지난 여름 한국방문길에 50대 아버지들을 만나서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 중 몇몇 분들에게 공통으로 들었던 말씀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너무 너무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아버지는 목사님이셨는데, 전화를 하면 울어버리실 것 같아서 그저 카톡 문자로 ‘아들아 미안하다. 아들아 미안하다’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러실까? 하고서 그분의 형편들을 짐작해보면, 아마 젊으셨을 때는 가족도 잊어버리고 바쁘게 목회일념으로 살아오셨는데 이제 한숨 돌리고, 이제 아이들 혼례도 치를 때가 되고 보니... 그동안 가정에 신경 쓰지 못하셨던 것과 또한 결혼하는 자녀에게 한 살림 떼내어 주지 못하는 넉넉치못한 형편에 마음이 쓰였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적인 정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부모님으로서의 일들을 감당하시는 분들임을 생각할 때,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재산, 가업, 가보 등등을 남겨주려고 합니다. 가정의 가장이라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남겨주고 싶을 것입니다. 어떤 부모님 중에는 원하는 만큼 공부는 시켜주지만 나머지는 기대하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미리 선언을 하시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에 나타나는 이삭이 에서의 일을 염두에 두고서 야곱에게 행한 축복의 내용들과 그 열매들을 생각해보면 딱 한 가지 ‘신앙의 유산’만 온전히 남길 수 있어도 나머지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앞날에 최고의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품은 야곱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육신적으로 물려준 것이 없습니다. 흉년의 때에도 백배의 결실을 하는 경영능력과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는 우물형통의 축복권을 가진 이삭의 재력이었다면, 많은 것을 줄만한데도 물질의 상속으로 본다면 야곱에게 돌아가는 몫은 전무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재산의 대부분은 이방여인을 맞이하여 부모의 근심이 되었던, 철저하게 자기 멋에 살아간 에서의 몫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런 에서에 비해 야곱에게는 오직 한 가지 아버지의 축복기도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기도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순종과 믿음의 결혼을 전제로 다시 한 번 더 집을 떠나야 하는 험한 행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야곱에게 육신의 재물은 없었을지라도 오직 신앙하나 붙들고 아버지의 축복기도 하나 마음에 새기고 가는 그의 나그네 길은 엄청난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말씀을 품고 가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은 그를 두 손 들어 마음껏 축복해주셨습니다.
믿음의 길은 소유의 유무와 상관없음
하나님 말씀의 축복을 사모하고 품은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서막이 이런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육신의 소유에 상관없이 비전과 꿈을 발견하는 복된 길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빈들광야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돌을 베개하고 누워야 하는 고단한 인생길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꿈결에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에, 상처에 바를 유일한 재산으로 보이는 기름 한 병 마저도 모두 하나님 앞에 돌베개 제단 앞에 모두 부어버리게 됩니다. 더 가난한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 앞에 서원까지 합니다. 축복의 말씀을 품었고 그 말씀 때문에 순종하는 길에서 만난 하나님 앞에선 야곱에게는 주저하거나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빈들광야, 바로 그곳이 말씀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서원의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이라면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모든 것이 갑자기 신기루처럼 한순간 변화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풍천노숙하는 나그네로서의 자신의 현실과 서원사이에 그 격차가 너무나 큼에도 불구하고 상관치 아니하고 기둥으로 세운 그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며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모든 것에서 십의 일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쉽게 할 수 없는 엄청난 서원을 맹세한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 현실의 간극은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꿈없이 잠들지 않고 꿈없이 깨지 않는 꿈꾸고 소망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야곱의 인생 결론
결과적으로 야곱의 인생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빈손 들고 갔던 그 나그네 길에서 그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처럼 거부가 되어 돌아옵니다. 147세의 장수를 누립니다. 자신의 열두 아들로부터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됩니다. 야곱의 모든 축복의 출발점에 아버지 이삭의 축복기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수받았고 그 믿음을 그 아들 야곱에게 전수하였는데,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축복하면 그대로 이루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것일 따름입니다. 자식에게 세상적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 만큼 자격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 자신이 이삭처럼 부모된 자격과 하나님이 응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축복하면 그대로 될 줄 믿으셔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가정
이를 위해 무엇보다 예배에 성공하는 가정이 되셔야 합니다. 아버지는 굵은 음성으로 자녀를 축복하셔야 합니다.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거룩한 손을 들어 가정을 위해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그 가정을 향한 하늘 축복의 문이 열려지는 줄 믿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의 잔소리를 많이 하셔야 됩니다. 영적인 잔소리는 부모의 고유한 특권입니다.
요한 웨슬레와 더불어 열 명이나 되는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의 대답이 아주 특별합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기를 완전히 꺾어 하나님 앞에 순종하도록 한 것이 비결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처럼 평생을 기도하면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어머니도 분명 위대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처럼 돌아온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또한 돌아온 후에 그동안의 방황했던 자식의 ‘잃어버린 세월’은 누가 보상합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하기 전에 부모로서의 최선의 순종과 결단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의 유산을 꼭 물려주십시오.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지 못할 때 정말 미안해하실 날이 불현 듯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어를 잊으면 신앙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에 아이들을 맡기십시오. 교회중심으로 가정과 삶의 일들을 재편하십시오. 교회를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저 찾아가서 안기기만 하면 어머니품안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자람과 성숙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늘 문이 항상 열려있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삭에게 있어서 야곱 같은 그런 복된 자녀들을 잘 양육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