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균 목사 (샤롯장로교회)
우리는 성경인물 중 누구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가? 야곱과 베드로라고 믿어진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너무나 닮았다. 그래서 나는 야곱을 매우 좋아한다. 그의 열정과 추구 실수와 회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태도, 그리고 회개와 축복 그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특히 본문은 절망적인 때 결정적으로 그의 운명을 갈라놓았기에 더 좋아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나의 모습도 그대로 보는 것이다.
1. 눈을 감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 본문에 나오는 처절한 형편이 왜 생겼는가? 형에게 쫓겨서 이곳 벧엘까지 단숨에 달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본래 조용한 사람이고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많이 가졌다. 반면 형 에서는 활동적이고 남성답고 사냥을 좋아 했다. 아버지는 활동적인 에서를 좋아했다.
에서가 활동적이기 때문에 묵상하는 것이나 조용히 기도하고 신앙적인 것에 관심을 덜 가진 반면, 야곱은 조용한 성격으로 집에 많이 머물러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집안의 신앙적인 전통과 족장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중요성과 그 위치, 축복의 근원,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그리고 특히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신 하나님의 약속 등을 세밀히 듣게 되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며 신앙적 전통을 중시하고 사모하였으나 그의 약점은 그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쟁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냥에서 돌아온 형을 꼬드겨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게 만들지 않았던가? 더 나아가 이번에는 어머니와 합작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을 속이면서까지(하나님이 순적히 만나게 하사....)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버렸다. 그가 좀더 일찍 영적 성장을 거듭하여 모든 인간적 활동을 접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집안에서 살인의 냄새가 풍기며 살기가 돋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수함으로 그는 형의 살해 위협을 느끼며 집을 도망쳐 새벽 이른 아침부터 브엘세바에서 이곳 벧엘까지 약 90km를 단숨에 달려왔던 것이다.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지쳤으며 얼마나 외롭고 위험했겠는가? 이불 한 자락 없었고 매트리스조차 발견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베개도 없어 그냥 땅을 매트리스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누운 것이다. 돌베개를 하고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쓸쓸하고 처량하며, 외롭고 위험한 인생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밤에 도적떼나 강도떼가 덮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사나운 짐승마저 좋은 먹잇감이 왔다고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처럼 무방비하고, 황량한 벌판에 아무 대책 없이 버려진 인생, 망망대해에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이 떠도는 삶을 누가 위대한 하나님의 족장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야곱자신까지도 자기의 비참하기 짝이 없으며 너무도 앞길 막막한 인생에 대해 아무런 인생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눈감았을 때의 우리 현실이다. 도무지 막막하고 되는 것은 없으며 무엇을 의지할 한 점의 조건도 없는 인생....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일 수 있다.
2. 눈을 뜰 때
비참한 자신을 돌아보며 불안하기 짝이 없고 암담한 미래를 안은 채 잠자리에 들었던 야곱. 그는 잠들었으나 잠 중에 영적인 눈을 뜨고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됐다. 이질적이고 소외되었던 자기에게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더니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고 그 약속을 이어받은 너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바로 이 땅이 네 땅이다. 네가 이 땅의 주인이다. 너와 네 자손이 이 땅의 주인이 되리라. 네 손들 때문에 땅의 모든 족속이 복 받을 것이다. 네가 어디 가든지 내가 동행하고 너를 지키며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하고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세상에! 잠들기 전과 잠든 후, 잠들 때와 영적 눈을 뜬 다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야곱은 이 꿈 이후의 삶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었다. 그는 잠을 깬 후에 서원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면 여호와께서 내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이 하나님 전이 되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신이 나서 약속했다.
그 야곱의 삶은 얼마나 자신이 있고 형통하며 감히 강한 외삼촌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나가는 모습을 수없이 볼 수 있다. 하는 일마다 복되며 형통하며 마침내 얍복강에서 얻은 이름 그대로 이스라엘이 된 것을 보게 된다. 눈만 뜨면 곧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분과의 관계만 복원되면 그 분 안에서 내 위치를 확인만 하면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아니 바로 이 회복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복이다. 자주 시간을 내어 그 분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해야만 외로움이 극복되고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성공이 물밀듯이 찾아온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 감복한 사람들이다. 아무리 포기하려고 하여도 밀려오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감격한 사람들이다.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넘어져도 오시고 잘못해도 오시고 외면해도 오시고 죄를 지어도 오시고 이 사랑에 우리는 다 항복한 사람들이다.
작가 오혜령 선생은 연대 영문학 교수의 딸이다. 연대졸업 후 이화여고 교편을 잡고 활동을 펼치던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던 잘나가던 인생이었다. 희곡작가, 방송인, 배우, 수필작가 그의 직함은 모든 사람이 흠모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학교에서 늘 배우던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가 없던 삶을 살았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에게 청천 벽력같은 선고가 내려졌다. 위암과 임파선암으로 3개월 시한부 인생이 선고된 것이다. 날마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가 3개월을 약간 넘긴 어느 날도 누군가가 보내준 백합 50송이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다가 강하게 낚아채는 손길에 그만 나뒹굴어져 찾아오신 예수님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또 쏟아 새사람이 된 그가 이제는 오직 주님만 위하여 하루에 9시간씩, 기도하며 경기도 시골에서 무의탁 노인을 돌보며 천국의 삶을 맛보고 있다.
눈을 뜨자!! 하나님을 만나자!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계획을 통해 내 인생을 바라보자! 나 자신과 명예를 위한 황량한 인생 무의미한 피곤한 삶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이 주신 생명을 살리는 인생으로 주인의 인생으로 새 삶을 그분과 함께 시작하자. 마침 닥쳐온 경제적 정치적 파국 속에서도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세계 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자. 남들은 우리를 보고 한심하다고 할지라도 영적 눈을 떠서 하나님만 바라보니 야곱의 축복이 우리의 것이라고 강하게 도전하신다! 복이 있으라. 그대 주안에서 신령한 눈을 뜨는 자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