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가 계속되는 가정

창세기 1장 26-28절

이규현 목사 (수영로교회)

가정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가정의 문제를 보편화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모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극소화시키는 경향은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결국엔 가정의 문제입니다. 가정의 문제는 오늘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창조의 원형으로의 회복을 꿈꾸며 더욱 발전하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사력과 에너지를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들이 많지만, 기독교에서는 언제나 성경적이어야 하고 그 해법은 창세기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 위기가 온 근원을 보면 결국엔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는 뿌리가 깊고 우리 삶에 교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숨어있어서 근원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문제를 풀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불행의 근원은 죄입니다. 관계를 깨는 것, 자존심의 문제, 상처를 주고받는 것도 죄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사람의 모습에는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가 들어있습니다.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서려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옷을 벗고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 몸과 사람이 영광스러워서, 서로가 볼 때 찬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쳐서 그 관계에 황홀함이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창조물 중에 최고의 절정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수치심과 두려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가리고자 했고,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고 변명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건강한 자아상이 부정적인 자아상이 되면서 자신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자신이 왠지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보아도 상대를 보아도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굉장히 혹독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수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수치심,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고자 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입니다. 자아상이 건강하면 자존감이 높고, 자존감이 높으면 내면에 안정감이 생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날카롭지 않고 건강한 이미지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자아상이 깨어진 사람들은 깨진 안경을 끼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을 건강하게 바라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도 왜곡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정 관계에도 역기능의 문제가 생기게 합니다. 자아상이 깨어짐으로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 범죄한 이후의 인간은 정상이 아닙니다. 즉,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은 모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기분 나쁜 분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것이 잘 안 되는 것, 이것이 비정상입니다. 고운 말을 하고 싶지만 삐딱한 말이 나옵니다. 좋은 말을 했는데도 상대가 듣기에는 꼬인 말로 들립니다. 이것이 모두 비정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실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얄 패밀리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들,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구별하고 구별해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왕적인 업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존중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면 남도 존중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는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시몬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시몬은 감정기복이 많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게바라고 불러주신 것은 반석과 같은 견고한 삶을 살라는 격려의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패하여 절망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부활하시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다시 사랑을 확인하게 하시고 일으켜 세우셔서 사도로 헌신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복음의 일은 아무리 과거가 어떠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다보면 자신감이 충만해집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 가정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 원하십니다. 회복하고 다시 용기와 소망을 갖고 우리 안에 낙심하고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 안에 자존감이 회복되고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실수와 연약함에 대해서 서로 충분한 격려를 해야 합니다. 백 마디의 잔소리보다 한마디의 격려가 훨씬 더 강력합니다. 따뜻한 한 마디가 가정 안에서 관계를 얼마나 회복시키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무너뜨리는 말은 사라져야 합니다. 서로의 가치를 존중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공부를 좀 못해도 다른 것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자신감을 주어야 합니다.

말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선포하면 선포하는 대로 됩니다. 딸이 얼굴이 좀 못생겨도 자꾸 예쁘다고 말하면 그 아이 안에 자존감이 회복됩니다. 아빠가 확신에 차서 “너는 정말 예뻐”라고 말한다면 그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부정적 자아상으로 자기 스스로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무너진 자존감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외모보다 내적 안정과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얼굴에 풍겨나면서 아름다움이 됩니다. 아이들에게도 “너는 잘할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계속 주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족관계 안에서 서로 축복하고 격려하고 자신감을 심어주고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충분히 인정해주고 마음껏 격려해줄 때 하나님께서 그 말과 같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허물을 덮고 존귀하게 인정할 때, 이 세상에서 아픔을 겪었더라도 가정 안에서 회복됨으로 용기와 살 소망을 얻고 자존감을 회복하여 건강한 이웃관계를 펼쳐갈 때 아름다운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가치,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주 어린 아이라도 존중해야 합니다. 아이는 소유물이나 부속품이 아닙니다. 내가 못다 한 한을 풀어줄 도구도 아닙니다. 그를 존중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줄 때,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 그것이 가정의 향기가 되고,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격려의 언어로 여러분의 가정 안에 날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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