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열 목사 (유니온연합감리교회)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무리”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과연 몇 명이나 모였을까요? 이렇게 무리가 모인 비슷한 경우가 두 번 정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5천명을 먹였습니다. 두 번째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떡 7개와 몇 마리 물고기로 남자만 4천명을 먹였습니다. 보통 신학자들이 동의하기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 때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다 합치면 약 20,000명 정도가 된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말이 4천명 5천명이지 사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 당시에는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 육성으로 4천명 5천명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실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1차 대부흥을 조나단 에드워드와 함께 주도하셨던 영국의 조지 윗필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1739년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윗필드 목사님께서 필라델피아 시내의 마켓 스트리트와 2가에 있었던 법원 건물의 발코니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 그날 25,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윗필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한 인간도 25,000명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냈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4, 5천명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신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1절에 “보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보시고”라는 말은 원어인 헬라어로 “horao”라고 하는데 그 뜻이 그냥 눈으로 본다는 뜻도 있지만 “마음으로 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그냥 아무런 의미없이 눈으로 보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에 그들을 모두 품고 바라보신 것입니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눈을 감으셔도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마음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여러분 한분 한분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산에 올라가”라고 나옵니다. 왜 굳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산에 올라가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인 것은 그 산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산을 좋아하시는 분 계시죠? 저도 산을 참 좋아합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세상에서 나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세상과 멀어지면서 하늘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것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주시려고 산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세상에서 분리시켜서 하늘과 더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하늘과 더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하늘의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앉으시니”라고 나옵니다. 아마도 산위의 한 넓은 바위 위에 앉으신 것 같습니다. “앉으시니”라는 말은 원어인 헬라어로 “kathizo”인데 그 뜻 중에 하나가 “누군가에게 왕국을 수여하기 위해 앉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앉으신” 것은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을 앉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앉게 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천국을 수여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천국을 수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입을 여신 이유가 뒤에 보니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고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입을 여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저는 이 말속에서 예수님의 자상하심을 느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입을 여셨는데 안타깝게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데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얼굴의 양쪽에 달려있는 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계십니다. 오늘 마음의 귀를 여시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입을 여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한글성경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고 나오지만 원어성경에 보면 “복이 있나니”입니다. 여기서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원어인 헬라어로 “makarios”인데 그 뜻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복이라기보다는 “행복” 즉, Happy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산위로 올라가셔서 한 넓은 바위에 앉아 당신의 입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하신 첫 말씀이 “makarios” “행복하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살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3절에서 10절까지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팔복”이 나옵니다. “뭐뭐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면서 8가지 복있는 자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원어성경으로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팔복’이라는 것이 어떤 일반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우리의 삶속에서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뭐뭐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기보다는 “뭐뭐하는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팔복”은 사실상 “행복한 사람의 삶”을 규정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또 그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사랑을 받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가장 큰 바람과 관심은 자녀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육신의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진데…언제나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들이 영생의 이쪽편인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에 있는 “팔복”입니다. 행복은 모든 인간들이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 행복을 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그 숨겨진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팔복”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천국의 설명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에 매여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팔복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서 행복하게 사는 비밀을 발견하는 여정을 떠나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