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익 목사 (신촌교회)
성경에는 많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약속 가운데 가장 큰 약속은 장차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 마침내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그 약속 그대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던 도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환영해야 할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다고 700년 전부터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 일에 대해서 100여 번이나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 최대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예수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7장에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낳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53장에서는 그가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 전체에 메시야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100여 번이나 됩니다. 그러니 마땅히 기다리고 환영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모두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배려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말은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는 말입니다. “인카네이션”(Incarnation)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즉 한문으로는 “成肉身(성육신)”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네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섭리의 주역이자 주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민족가운데 이스라엘 베들레헴 고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셨고 실제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렇기에 열광하고 환영했어야 마땅합니다.
결정적 하자
그런데 정작 그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환영도 축하도 영접도 하지 않았습니다. 700여 년 동안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오셨는데 누구도 몰랐습니다. 또한 맞이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무성의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결정적 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다음에 주님이 오실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은 모두에게 방심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을 벌써 알고 기다렸지만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이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오실 그 날에도 그런 현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까지도 예수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직도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 400만 명의 유대인 중에서 단지 0.1%만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합니다. 그 0.1%의 사람들도 나라 밖에서 예수를 믿고 건국 후에 귀국한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기독교를 유사종교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류를 범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그런 오류를 범한 것일까요? 그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이 100여 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 그것도 유대 고을 베들레헴에서 나시리라고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랬으면 마땅히 그곳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거기에 처소를 예비하고 전체적 연구 기관이라도 세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예언 때문에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면 수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야지 어찌 시골의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자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동시에 지독한 편견입니다. 이 편견이 무서운 것입니다. 편견은 보석을 돌이라고 하고 돌을 보석이라고 우기게 만듭니다. 이 편견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여 예언과 계시를 무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기득권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회 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기득권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자 고소득층으로 많은 것을 누리는 기득권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새 인물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제거해야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들의 안전에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요인은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기다림의 삶이 중요합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 옆에 끼고 다니며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의 예언서를 매일 필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오심을 누구보다 더 빨리 알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알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알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관심은 신앙의 삶 보다는 뇌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영적안목이 흐려졌고 그 결함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눈도 멀게 하고 그 시대를 보는 분별력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예수님 오신 날 낌새도 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지 않던지 약속하신 그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오신 예수를 가장 먼저 찾아와 만난 사람은 멀리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문만 열면 만날 수 있었던 여관집 주인도 몰랐는데 그 멀리 동방 오늘의 이라크 땅에서 온 사람들이 미리 알고 찾아와 만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동방박사들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천사들이 예수 태어나심을 계시해주었습니다.
신앙의 삶에는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도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지 언제든지 기다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감으로 천사들이 계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기다림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또 예언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 말씀대로 어느 날 다시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