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하는 인생

레위기 19장 9-10절

최해근 목사 (필라, 몽고메리교회 담임)

어린 시절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 때 보리 추수가 시작될 때면 꼭 봄방학을 하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상급학년을 중심으로 자원봉사에 동원(?)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답답한 교실에서 벗어나 보리 베는 일에 동원되어 일을 하다보면 교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묘한 차이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교실에서야 공부 잘하는 선비들이 우대받지만 보리 추수의 현장에서는 보리를 잘 베는 그런 학생들이 최고로 인정되었고, 동네 어른들로부터 칭찬도 독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이 현직 교사였던 자녀들은 평시에 낫을 잡고 일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낫질이 어눌하고 느리기가 딱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그런 학생들 집에는 낫자루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등치가 좋고 공부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이런 날이 되면 고기가 물을 만난 경우가 되었습니다. 어른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거기다가 음식까지 더 챙기게 되는 보너스 혜택을 누리면서 보리밭을 설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리추수가 끝나면 보리수매가 있었고, 수매를 하고 나면 돈이 귀하던 동네에 마치 가물어 터진 논에 비가 내려 그 틈새를 막아내는 것처럼 동네 이 집 저 집에 현금이 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골동네 경기가 풀리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보리추수의 계절은 그야말로 보리농사를 지었던 농민들에게는 봄에 경제적 허기를 면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였습니다.

본론

성경은 이와 같은 경우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바로 맥추절과 같은 추수의 절기입니다. 어느 민족이든 관계없이 추수의 계절은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마음의 여유를 주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좋은 추수의 기쁨을 더 아름답게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이 기준을 잘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면 비록 농사를 짓지 않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더 따뜻하고 풍성한 삶을 갖게 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추수의 계절에 추수할 것이 없는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며 추수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기 19:9-10은 추수할 때의 원칙을 밝힙니다. 밭모퉁이까지 다 돌아가면서 철저하게 수확을 챙기는 것을 금하셨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도록 하셨고, 심지어 포도원의 열매도 다 따지 말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같은 추수의 원칙을 제시한 신명기 24:19-21에서는 곡식을 벤 후에 한 뭇을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하였을 때에 다시 밭에 돌아가서 챙기지 말고 그냥 버려두도록 요구하셨고,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의 열매를 딴 후에 가지를 다시 살피지 않도록 하셨다. 그런 모든 것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추수의 계절은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계절이지만, 추수할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아프고 쓸쓸한 계절이 될 수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한 이웃들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가 함께 추수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방법으로 추수하는 원칙을 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추수할 농작물이 없는 그런 직업이나 사업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를 해 주는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추수할 것이 없는 그런 직종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진학하는 그런 시즌입니다. 명문사립대학에 입학이 허가되어서 감사하지만 그런 대학에 갈 능력도 실력도 없는 그런 학생들을 조금만 생각해 준다면 자라나는 자녀들이 훨씬 덜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가 함께 졸업과 진급과 입학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인생을 세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몇 몇 가진 사람과 배운 사람과 위에 있는 사람들만이 기뻐하는 그런 상황이 아닌,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러한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사회와 교회를 원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추수와 관련된 안식년의 규례를 통해서 배우는 진리입니다.

레위기 25:3-7에서 안식년 규례를 밝히고 있습니다. 6년 동안은 밭에 파종하여 위의 방식으로 추수할 것이지만 제7년째에는 밭에 아무것도 파종하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것도 파종하지 않음으로써 땅으로 하여금 쉬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원도 주인이 다듬고 거름 주고 가지치기를 하던 평상시의 상태에서 벗어나 포도원에 손을 대지 말고 자연 상태로 둘 것을 요구하십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에 맺게 된 열매는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농산물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풍족하게 농산물을 줄 수 있도록 안식년에 쉬고 있는 밭을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경작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밭에 아무런 씨앗도 뿌리지 않거나 포도나무 가지를 전혀 관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얻게 되는 농산물의 양은 분명히 씨앗을 뿌리고 포도나무를 관리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적게 소출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더 많은 소출을 내어서 더 많은 가난한 이웃들을 돕도록 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양의 물질과 돈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이웃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이 손댈 수 없는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안식임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세상 앞에서 자칫하면 더 많은 재정과 먹을 것과 약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만, 하나님은 세상의 진짜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참된 안식’의 부재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2005년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이는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고, 세계 인구 7분의1에 이르는 8억5000만명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습니다.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면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량생산을 늘려야한다고 답을 합니다. 그런데, 1984년 유엔식량농업기구 FAO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해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지금 인구의 2배인 12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안식이 없는 인간영혼의 빈약함이 약자의 가난을 이용하여 배부른 자의 배를 더 채우는 죄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분명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은 빵과 더불어 영적인 안식을 세상 앞에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안식이 없는 빵은 반드시 한 곳으로 모이게 되고, 가지지 못한 곳은 굶주림과 죽음과 폭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더욱 더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빵과 함께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추수의 때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장 기쁠 때, 내가 기뻐하는 그런 이유를 갖지 못해서 아파하는 이웃과 지구촌을 볼 줄 안다면 우리는 추수의 들녁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눌 때 마다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가 나누는 것만으로 세상의 필요를 채울 수 없음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는 삶의 추수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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