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은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의 지파별 대표들이 회중들 앞에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보고의 내용이 두 편으로 나뉘어집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은 에스겔 골짜기의 포도송이며, 석류, 무화과 등의 현실적인 풍성함과 부요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나안의 장대한 족속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헌신하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정탐꾼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하면서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한 헌신의 부담스러움에 주목합니다. 자신들은 메뚜기 같은 존재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자신들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이와 같이 두 부류로 나뉘어짐을 봅니다. 같은 일을 두고서도 관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하고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그 관점(Viewpoint)을 그가 가진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사람은 그가 가진 믿음이라는 그 관점을 통해 그 믿음만큼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I.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사람의 감관(感官)은 보다 정확한 앎을 위한 것인데,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사람의 육안으로 본 것이 절대로 온전한 앎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흔히 ‘보고 믿겠다. 내 눈으로 봐야 인정하겠다’라고 하지만 온전한 앎에 이르는 것은 결코 감각적인 눈으로만은 너무나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과정에도 영안이 열려야 한다는 말을 쓰는데, 결국 이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아래 보아야 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먼저 열릴 때 너의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눈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생명을 주실 때도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먼저 열어주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의 소중한 믿음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부터(롬10:17) 생긴다는 것을 보면 결국 잘 듣는 것이 좋은 믿음임을 알게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보았던 사실(fact)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이 두려워 소동을 합니다. 이에 갈렙이 속히 백성들을 안돈 시키고자 애를 씁니다. 그 결과 갈렙은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나머지 정탐꾼과 저들의 말에 동조했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사실(fact)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들을 징계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보는 것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처럼 ‘믿음없는 말, 신앙없는 말’을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악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문제로 법정에 갔다고 하면 그 판사는 틀림없이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fact)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믿음으로 말할 때는 이것이 전혀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심각한 말이 됩니다. 전달하는 과정이 참으로 악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들의 판단이 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II. 믿음과 신앙의 언어를 사용
말을 똑바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속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들 신자의 삶속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망할 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 민족, 교회가 망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열명의 믿음 없는 리더들의 말로 인해서 이백만 백성이 그 말을 따라가다가 광야에서 거의 매일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 가운데 믿음의 말-신앙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가운데 믿음의 말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열명의 정탐꾼과 같은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이루는 교회나 가정으로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수아나 갈렙 같은 사실을 넘어서 신앙의 말들을 한다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엄청난 능력과 축복의 증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린 것을 봅니다.
열명의 정탐꾼들은 보는 일에는 탁월하고 말 전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력은 바닥을 치는 아주 믿음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는 것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말씀의 진리에 대해서는 귀를 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믿는 만큼 말씀을 기억하게 되고 그 말씀을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데, 믿는 만큼 말하고 믿는 만큼 살아가게 되는데, 그 믿음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갈렙을 봅시다. 그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30절에 갈렙은 백성들을 ‘안돈시켰다/안전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을만 하다.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그 말로서 백성들을 안돈시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배신하고 등을 돌렸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갈렙을 인정해주시고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과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정정한 건강과 땅을 취하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III. 교회에 큰 일은 없음
가끔씩 교회에 나타난 현상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교회에 큰일났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무엇입니까? 다만 갈렙처럼 볼 수 없는 믿음없는 자기자신이 존재할 따름인 것입니다. 문제를 온전히 다룰만한 자신의 믿음이 없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큰일났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일이라고 말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나의 믿음 없음이 진짜 큰일입니다. 만약 나의 믿음이 갈렙같을 수만 있다면 설령 교회의 큰 일 같은 문제도 해결이 될 것이며 그 사람은 갈렙처럼 외려 혼돈한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함께 위대한 믿음의 보상과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갈렙에게 우리는 많이 배워야 합니다. 골방에서 기도만하다가 나와서 폼나는 믿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왔고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을 안돈시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결국 믿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악조건인 것을 알지만 그의 모든 관점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문과 가정을 일으키고 교회를 복되고 안돈케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