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목사 (인천 제2교회 담임)
양쪽 무릎 아래를 완전 절단하였을 뿐 아니라 양쪽 팔꿈치 아래도 모두 절단된 사람이 20km를 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 애슬리 코완이수영을 시작한지 약15시간 만에 새벽의 칠흙 같은 어두움을 뚫고 그 소녀는 캐나다 이리호 연안 크리스털 비치에 모습을 들어내 자신의 횡단성공을 세계인들, 그리고 모든 장애우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오병이어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남자만 오천명, 그러므로 여자와 어린아이들 까지 포함하면 약 2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였다면 그대로 믿겠습니까? 솔직히 믿어지십니까? 조금 전 “애슬리 코완” 소녀 이야기를 믿는 것, 차라리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은 음식을 주워 담은 광주리가 12개가 남았다면 더 더욱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신앙성장을 막았던 암석과 같은 것, 즉 성경을 읽고 듣다보면 상식선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씀 때문에 상식선으로 이해되었고 은혜 되었던 말씀에 대한 좋은 마음까지 나쁜 것으로 퇴색되는 이런 신앙을 언제까지 달기 싫은 꼬리표로 달고 다녀야 할 것입니까?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앞으로 백년 후에는 사람들이 로켓이라는 것을 타고 달에 가서 토끼를 만나 그것을 잡아서 토끼탕을 해먹을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사람이 달에 갈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면 쓸데없이 공상적인 이야기만 하며 아까운 밥만 축내는 녀석이라는 핀잔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백년 전의 사람들에는 정말 이해될 수 없고 비합리적인 이야기들로 들렸을 그 이야기들이 백년 후 지금 다 이루어졌고 도리어 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이해되기에 믿고 내가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해되기에 절대적이요, 완성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신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음이 하나님 편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사역이요, 행함이요, 계획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진리를 모세의 고백을 통하여 들어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또한 시편기자의 고백도 유심히 들어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한 가지 더 들어보아야 합니다.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암4:13). 즉 아모스 선지자의 고백이요,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하나 밖에 없는 님’,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며 다스리시는 한 분 밖에 없는 참된 신이심을 고백하시기 원합니다. 그 때 자신의 눈높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로 성경의 사건들을 볼 수 있으며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내용을 향하여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며 볼 수 있는 새로운 안경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왜 기록되었으며 왜 오늘 내가 그 말씀을 읽거나 듣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참된 믿음은 기말시험 문제해답을 줄줄 외우는 것과 같이 배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도님들에게 찾아오는 것이며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어떤 사물을 잡듯 잡아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믿음에 사로잡히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런 참된 믿음은 ‘길’과 같습니다. 물론 이 길은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가는 산책로는 결코 아닙니다. 전쟁터 한 가운데의 위험한 길과 같습니다. 영적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끊임없이 성경의 기적적인 내용을 믿지 못하게 하는 옛 본성과 마음 그리고 악한 세력에 의하여 위협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 자신, 또는 불신케 하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미 우리들에게 선물로 좋은 믿음, 절대적인 믿음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셨으면 그 믿음을 빼앗고자 하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연승하기 위해 더욱 더 하나님 편에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적의 최종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적 은총은 너무나 그 진리와 교훈이 소중하기에 4복음서에서 모두 언급하고 있습니다(막6:30-44, 눅9:10-17, 요6:1-14).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중요한 교훈이기에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도해야 하고, 또한 식사기도한 후 식사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빼앗기도 하실 권능이 있는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면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의 삶 전체를 책임져 주실 것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이미 너무나도 축복된 언약을 우리에게 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농부가 땔감을 얻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 가보니 낭떠러지에 한 소년이 떨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몰래 사냥을 나왔다가 길을 잃어 실족한 임금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농부의 소식을 듣고 임금님은 그 농부에게 아들을 살려준 보답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집, 농토, 권세, 많은 돈, 자식의 취직문제 무엇이든지 내가 들어주리라!” 그러나 그 농부는 모든 것을 사양하고 한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임금님, 임금님께서 사랑하는 그 아들을 1년에 열흘만 저의 집에 유숙케 하시면 원이 없겠습니다!”
임금님은 농부의 소청을 쾌히 허락하였고 소식을 들은 동네사람들은 그 농부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왕자가 농부의 집에서 쉬기로 작정한 날이 다가오자 왕궁 관리들이 나와 왕자가 편히 그 집에 도착할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농부의 집도 고치고 아름다운 정원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자가 편히 쉬도록 고급 가구를 가져와 설치를 하였습니다. 또한 왕궁 요리사들이 귀한 음식재료를 창고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농부가족들이 너무 초라해 보이면 왕자의 마음이 괴로울 것이라며 농부의 식구들을 위한 아름다운 의복들을 보내고 왕자를 위하여 혹 농부가 대접할 일이 있으면 사용하라며 엄청난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농부의 모습이요, 하나님 존전에서의 복 받을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의 표상일 것입니다.
분명, 이 농부는 임금님께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왕자의 방문을 원하였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왕자를 자기 집에 모시므로 모든 것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농부의 모습이요, 하나님 존전에서의 복 받을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의 표상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지금도 우리와 만물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섭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을 자신의 영육의 구주로 영접하는 신앙은 교회 다니는 그 어떤 목적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분께 기도드리며 그 분을 찬양하고 그 분의 교회 일에 동참하며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도 그 예수님이 원하시면 그 오병이어의 축복을 자신의 신앙과 삶의 현장에 주실 줄 믿는 믿음을 안고 새롭게 사시는 거듭난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