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운 목사 (벅스카운티장로교회 담임)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속사를 예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이삭은 그리스도를 종은 성령을 리브가는 성도를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찾은 리브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부감입니다. 본문에서 오늘날 성령께서 찾으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감의 모습을 찾아서 적용해 봅시다.
순결한 영혼입니다.
16절에서 그 소녀는 무척 아름다웠으며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리브가가 아름다운 것은 단순히 외모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순결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감으로 성령님이 찾고 계시는 성도의 모습은 학벌이나 가문이나 재산이나 외모가 아니라 바로 몸과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하루에 9,077명이 출생하는데 1,282명이 사생자이고, 5,962쌍이 결혼하여 1,986쌍이 이혼하며, 2,740명이 가출하고 69,493명이 성병에 감염되고 2,740명의 십대소녀가 임신한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지상 천국이라고 말하는 미국이 이렇게 된 것은 정치나 교육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순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의 생활비 중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지수라고 합니다. 후진국일수록 그 지수가 높고 선진국일수록 낮습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는 영적인 엥겔지수가 낮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물질 마음보다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분량이 많을수록 영적 엥겔지수가 올라가겠지요.
지금은 엘리의 때처럼 계시가 막힌 것 같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의 때에 사무엘을 택하신 것은 단 한 가지 영혼의 순결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과 교회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와 같은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남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입니다
18절과 19절에서 노인과 짐승(낙타)을 친절하게 보살핀 리브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볼품없는 노인과 낙타가 얼마나 목이 마를까를 생각하는 리브가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친절한 마음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된 성도가 가져야할 열매가 아닐까요? 배려에 대한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배려란 주위 사람이나 사물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존중하는 태도로 그들을 대하게 되며, 사물을 보다 조심스럽게 다루게 됩니다”
어느 교회 가족찬송 경연대회에서 집사 한 사람이 가족과 함께 잘 아는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습니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어 담임목사 가정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어떤 부분에서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리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처럼 메모해 놓은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7월 14일,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찬송가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친절한 마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자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11:17) “의인은 가축의 생명도 돌봐 주지만 악인은 따뜻한 온정을 베푼다 하더라도 잔인하다”(잠12:10)
남을 섬기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20절은 리브가가 물동이에 남은 물을 곧 구유에 붓고 다시 우물로 달려가서 더 많은 물을 길어 왔다고 증거 합니다. 섬기기를 기뻐한 리브가의 모습을 봅니다. 말이나 마음만 가진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의 수고를 실천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려갔다고 20절에서는 달려갔다고, 모든 낙타를 위하여 수고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소녀가 열 마리의 낙타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의 필요성에 대하여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신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필리핀의 유명한 부자 사업가의 아들 카풍카우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 가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더럽고 냄새가 나는 등 너무 불결해서 불만을 품고 학장에게 갔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좀 치워주십시오. 깨끗하게 해주세요.” “알았네. 내가 다 알아서 조치할 테니 가 있게.” 조금 뒤에 이 학생이 그 화장실에 가 보았습니다. 요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씻는 소리, 닦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소부를 데려다가 청소하는 줄 알고 들어가 보니 학장님이 직접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학장님이 기쁘게 청소를 하다가 이 학생을 보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게. 이제 깨끗해질 테니 염려하지 말게.” “학장님, 청소부 데려다가 시키면 될 텐데 왜 직접 화장실 청소를 하십니까?”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니라네. 교회나 신학교는 일을 보는 사람이 먼저 하는 걸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네.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네.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잘못됐다고 보는 사람, 쓰레기를 보는 사람 하나하나가 청소할 때 우리 삶의 주변은 깨끗해질 수 있는 걸세. 자네가 부잣집 아들로 여기 와서 보니까 좀 불결하게 보이지. 다른 사람은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네. 그러니 느끼는 사람이 일을 하면 이 학교는 깨끗해질 수 있는 거라네.”
우리들은 모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외우고 있으면서 사랑의 수고에는 인색하지 않습니까?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이 의미를 더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여러분을 말하며 여러분 모두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이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살전1:2-4)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기도일까요? 열심일까요? 직분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신부다운 영혼과 삶의 열매입니다.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순결과 자비와 섬김의 기름을 점검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