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삼 목사 (나성제일교회)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이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고, 잘못하면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라는 엄청나고도 무서운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금식기도, 헌금생활, 구제할 때 ‘한다’라고 떠들지 말고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할 때에 광고하거나 소문내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자세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 금식, 기도, 헌금, 선행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는 PR시대입니다. 매스컴시대라고 합니다. 광고의 효과에 따라서 매상이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광고하며 자랑하면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남들의 말이나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주관이 없어집니다. 남들의 평판에 이끌려 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주도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고, 타인 주도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은 행복이 없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 다른 사람의 평판에 끌려 다니는 신앙은 위장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이 되고 맙니다. 기도 시간은 하나님과 나와의 진실한 대화의 시간이다.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은밀한 중에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만남입니다. 신비로운 역사의 시간입니다. 행복이란 일종에 나의 비밀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 안에 나의 기쁨이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누가 나를 아무리 부러워한다 할 찌라도 내 안에 기쁨이 없으면 불행한 것입니다.
성경에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14:10)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만의 행복 이것은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그 누구도 모릅니다. 오직 나와 하나님만 아십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도, 행복도 다 나의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이유 없는 반항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참 훌륭하고 저 사람은 어쩌다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남모르는 비밀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남들이 모르는 숨은 비밀이 있고 남들 모르게 애쓴 노력과 아픔과 인내와 수고와 혹은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공의 비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만의 고통을 부르짖는 것이 간구요,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만의 행복을 고백하면 그것이 감사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 담겨있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남들이 아무리 칭찬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속이 고통이 있는데 말입니다. 또한 남들이 아무리 비난한다한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정작 나는 기쁘고, 나만이 아는 행복의 비밀이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나만이 아는 신령한 기쁨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다”(렘15:16)고 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말씀이 나의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돼야 할 것입니다. 교회만 그냥 출석하는 교인과 참 신앙인의 차이점이 어디 있습니까? 나만이 아는 영적 체험이 있고, 신앙적 간증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있는 사람이면 그는 참된 신앙인입니다. 사도바울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자신도 잘 모를 정도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곤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나만이 아는 고통을 가지시고, 나만이 아는 문제를 갖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은밀한 관계가 신앙입니다. 신앙은 진실입니다. 반대말은 외식입니다. 위선이고 쇼업(Show up)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보이려고 외식적으로 웃고 거짓으로 우는 광대와 같습니다.
기도는 광고할 사항이 아닙니다. 기도도 금식도 구제도 선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 볼까봐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세수하고 표시내지 말고 나타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남들이 몰라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아시고, 나만의 기쁨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빌라도 앞에 섰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소리 지르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가 구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의 생각은 저 멀리 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이것으로 모든 비난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웃음에는 예수님은 세인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 말씀을 존 칼빈은 임종 시에 27번 외웠다고 합니다. 존 칼빈 선생님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기쁨 속에서 임종을 맞이한 줄로 압니다.
옛날에 우리들이 생각으로만 꿈꾸던 환상적인 것들이 지금 현실로 주어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마이카(My Car) 시대가 그렇고, 컴퓨터가 그렇고, 핸드폰이 그렇고, 요즈음 더 놀라는 것은 아이폰(i-Phone)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주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스런 행복, 신비스런 기쁨이 있습니까? 나만이 볼 수 있는 창문이 있습니까? 이 비밀과 이 행복 속에 오늘을 사는 사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는 웃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죽어갈 수 있고 성도는 이런 영광스런 비밀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참 행복은 내 마음 속에 나만이 아는 기쁨이 행복입니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신앙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신앙을 소유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