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줄 신앙동지들

전도서 4장 9-12, 고린도전서 13장 7절

서정오 목사 (서울 동숭교회)

성경을 읽다보면 ‘서로’라는 말이 243번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명령문 형태로 쓰여진 것이 60개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 ‘서로 위로 하라’ ‘서로 격려’ 등입니다.

이 60개 정도의 명령문에 서로라는 말이 들어간다는 것이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나 혼자 예수 믿겠다, 혼자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겠다’ 그렇게 고집한다면 여러분은 60개 명령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묵상해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함께 더불어 같이 살게 지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되 혼자 믿는 사람은 어쩌면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창조의 원리도 기독교의 정신도 믿음의 본질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지요. 기독교 신앙자체가 혼자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 사랑해라. 이웃사랑해라.” 이것은 두 계명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계명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한 덩어리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라’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골자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상처도 받습니다. 얼마나 포기해야 할 게 많고 희생해야 할 게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훈련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 않고는 배울 수도 익힐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도서 4장 본문에서는 이렇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축복과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수 있을까요?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몇 가지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허물을 덮어주라.

고전13:7절 ‘참는다’의 뜻은 ‘지붕으로 덮다’ 의역하면 조용히 넘어가라는 뜻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에 보면 ‘사랑은 덮어 주는 것입니다’라고 돼있습니다. 사랑은 남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 사람의 실수를 이사람 저 사람에게 나발 불고 다닌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실수했을 때, 형제와 자매가 연약해 힘들어 할 때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험담이란 남의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소문내서 그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문제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어렵게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책임의식 없이 남의 말을 옮기면서 그 당사자가 받을 아픔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참으로 비정한 행위가 바로 험담입니다.

우리는 험담이나 비판을 경범죄처럼 가볍게 여기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인과 간음만큼이나 사악한 범죄로 여기셨고 또한 그 처벌도 굉장히 엄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험담은 인간의 모든 관계를 조각내버리기 때문입니다. 험담은 아주 친한 사이를 이간질, 우정을 산산조각 냅니다. 험담은 가족관계를 깨뜨립니다. 교회공동체를 산산조각 나게 만듭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할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를 깨뜨리고 장로님들의 관계를 갈라놓고 구역식구들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사탄적인 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믿어 주어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삶을 맡겨 버리는 것,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투자는 손해 볼 수도 있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것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랑의 속성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100번 속아도 101번 믿어주는 게 어머니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믿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나한테 속으시고도 지금도 그렇게 믿어주시면서 내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사명을 주시고 내게 은혜가운데 인도해 가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태9장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에게 나아온 네 친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게 아닙니다. 그 네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혼자 힘으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일들로 인해 너무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져 내 영혼까지 황폐해져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을 우리는 수도 없이 만나는 법입니다. 그때도 나의 형편없는 나의 실패한 모습을 보면서도 나를 믿어주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을 때 그들의 믿음 때문에 주님은 나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신앙의 동지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형편없이 실패해서 다른 사람이 돌멩이를 던진다 해도 여러분만큼은 그 곁에 지키고 서서 그를 얼싸안고 함께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영적 친구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순례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로 ‘기대하라’

.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란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뭘 받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앞날을 기대하고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친구 중에 진정한 우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가 잘 못되는 한이 있어도 네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이죠. 그러나 세상친구들은 그것이 쉽지 않지요. 우정도, 나는 못하는데 친구가 이루어놓고 나면 질투와 경쟁대문에 배가 아픕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로 만나는 것 같아도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하지만 ‘나보다는 좀 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에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만날 때 순결한 마음으로 ‘내가 잘못되더라도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고 기대하는 것이니까요. 좋은 꿈을 그를 위해 꾸는 것이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면 여러분 곁에도 그런 온전한 사랑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건강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그대로 내 친구들도 하게 될 것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희생하라’.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견딘다는 말 자체가 그분, 사랑하는 사람 밑에 내려앉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헌신을 두려워합니다. 헌신했다가 희생했다가 배신당할까봐 두려워서 멀찍이 섭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도 두려워합니다. 어느 교회 등록할 것인지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등록했다가 상처받을까봐서죠. 소그룹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곳도 참여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대충 적당히 신앙생활 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은 안전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별로 재미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신과 희생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감격도 재미도 기쁨도 없기 때문입니다. 헌신과 희생에는 아픔도 상처도 남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헌신과 희생이 있는 삶에만 생명력이 있고 인생의 기쁨과 감격이 있게 됩니다. 때론 상처도, 아픔도 겪을 수 있지만 그러면서 속사람이 영혼이 성숙해가는 위대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정정] 본지 제 1291호 제4면 “푸른초장”의 필자 ‘이희본’은 ‘이희봉’으로 정정합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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