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록 목사 (포코노한인장로교회 담임)
‘오순절’이라는 헬라원어는 “πεντηκοστή”인데, 이 말에는 원래 ‘제50’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신16:1, 10, 13) 중 하나이고 유월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니산월 14일) 축제기간 중 첫 이삭을 드린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칠 주(49일) 후 50일째 되는 날에 거행됩니다. 그래서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출34:22; 신16:10).
이 절기는 대개 유대력 ‘시완’월 16일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5월말이나 6월 초순이 됩니다. 이 날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처음 익은 밀과 보리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 한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시대교회의 시작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오순절은 추수제에서 성령강림절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1.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1)
모인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첫째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명령과 더불어 약속하시기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모인 무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여기에서 “저희가 다 같이”라는 말은 “꼭 같이”, “한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곳은 저희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행1:14) 곳입니다.
다 함께 모이는 것은 교회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다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고 하였습니다. 지체는 더불어 있을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두고 생각해보면 그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우리의 몸에도 여러 부분의 지체가 있습니다. 눈, 코, 귀, 입은 그들의 위치에서, 손과 발 역시 제 위치에서 제 위치를 지키며 할 일들을 제대로 할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치와 기능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그 본래의 위치를 지키지 못할 때 곧 사고를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지체의 아픔은 온 몸에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몸의 그 어떤 지체이든지 그 지체에 대한 아픔은 한결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의 연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체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각기 고유한 역할분담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은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도 “주 믿는 형제자매들 그 몸은 떠나 있으나 주 앞에 기도드릴 곳 다 함께 모일 시은소”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교회는 미움도, 원망도, 불평도 버리고, 한 마음으로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다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합니다.
2.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2-4). 성령 강림은 세 가지 징표 곧, “바람과 불과 방언”으로 나타났습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강하게 몰려와서 방안에서 요동치는 공기의 흐름과 같았고, 시내산에서 울려 퍼진 나팔소리(출19:19, 히12:19)와도 같았습니다.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그들이 모여 있던 방을 가득 채운 이 신비한 기운은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여기에서 ‘불의 혀’란 실제로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불은 구약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상은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16-25장)과 그 현상과 병행합니다. 즉 성령이 강림하는 모습은 율법이 시내산에서 공포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본문에는 성령이 임할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도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로 인하여 온 산이 진동하고 연기가 자욱했으며,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출19:16-19).
성령이 ‘각 사람’위에 임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욜2:28-32)과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옛 언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었으나(민11:26-29; 삼상10:6-12), 이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심을 보여줍니다.
“각 사람 위에”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1)는 것은 그들이 ‘한 곳에, 다 같이, 한 마음으로, 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을 때, 그들 각자 위에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는 대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따라서 각각 분량을 다르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나중 종들과 회계할 때, 숫자를 가지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실함과 충성됨을 가치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도 그러한 것입니다.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것도 이와 유사한 것입니다.
3.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4). ‘누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주를 믿는 무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시는 성령님(롬8:9; 고전12: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신앙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이란, 빈 항아리에 물을 붓듯이 성령이 공간적으로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지시하시는 대로 행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4)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었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고, 그들 앞에 모여든 각 족속들의 방언으로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상한 언어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주님께서 원하셨던 방법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참으로 놀랄 일입니다.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7, 8)라며, 다른 여러 지방에서 모여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겼다”(7)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도 합니다.
전혀 생각 밖의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매일 매일의 용기와 능력의 원천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셨을 때 권능을 받았고(행1:8), 산헤드린에서의 베드로의 용기와 능변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고(행4:31), 구브로에서 무당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한 바울의 승리는 곧 성령의 역사였습니다(행 13:8-12). 마찬가지로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는 기독교인의 용기와 능력이나,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투지나,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배짱이나, 주위 환경과는 관계없이 성도가 갖는 기쁨과 소망은 모두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성령의 기적을 더욱 많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 가운데 “내려오셔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그들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들을 지도하게 될 율법을 주셨으며, 또한 그들을 시내산으로부터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까지 가나안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오순절에 그의 백성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들의 하나님과 구주가 되심을 선언하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믿고 행할 바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님께서 이미 강림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