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심포니교회)
요셉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셉 하면 꿈의 사람, 비전을 이루는 사람으로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요셉이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은 한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하나님에 이끌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사람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지만, 그 사랑이 그가 가장 끔찍하게 버림받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랑받아야 할 형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종으로 팔렸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런 고난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그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요셉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 (창39:2, 2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형통했습니까?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 친형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종으로 팔려 간다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형통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요셉과 같은 이런 형통한 삶을 원하십니까? 성도의 형통은 세상에서의 형통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세상에서의 어떤 삶도 형통한 삶입니다. 전 재산을 모두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형통한 삶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모든 부와 권력, 행복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형통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고난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성도는 요셉을 보고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지고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기로 다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꿈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실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어떻게 일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그의 형들보다 특별히 더 사랑해서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 일로 인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이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해서 일까요, 채색옷을 입혔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창 37:3-4)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채색옷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채색옷은 여러 가지 색으로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입힌 채색옷은 왕족들이 입는 손바닥까지 덮는 소매가 긴 속옷을 말합니다. 또한 이 옷은 장자권을 나타내는 옷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장자권은 당연히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에게 가야 했지만 열 한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대상 5:1-2)
맏아들 르우벤이 범죄로 그 장자권을 빼앗겼으면 다음 아들 시므온에게 가야 했지만 그렇지 않고 열 한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은 두 언약을 의미합니다. 레아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라헬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레아의 아들들은 장자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장자권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는 요셉, 즉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헬의 맏아들 요셉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족을 상징하고, 상속권을 상징하는 채색옷이 요셉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잡아 구덩이에 던질 때, 그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겼습니다. 속옷인 채색옷을 벗겼다는 것은 알몸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질 때, 요셉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예수님도 요셉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속옷이 완전히 벗겨지고 알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모형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로, 왕으로 오실 것을 예정하신 것처럼, 요셉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미리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 택하신 자에게 고난의 형통을 주십니다.
형통한 삶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이들이 부모 말씀을 잘 듣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합니까?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은 이런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삶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합니다. 비천에 처하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백성들과 요셉의 가족들을 위한 구원자로 삼으시기 위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로부터 은 20에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형제인 유대인으로부터 은 30에 대제사장들에게 팔린 것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팔려간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합니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보디발의 종으로 있을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것같이 행동을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택함받은 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은 앎이라” (벧전 5:9)
만약에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내가 정말 택함받은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하고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택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요셉은 단지 하나님의 꿈을 위해 쓰임 받은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수 없이 많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렘 7:23)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잘 해석했기 때문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꿈을 요셉이 해석을 했습니까?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 41:15-16)
꿈의 해석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셔야 꿈을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백성들과 요셉의 가족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능력이 아니라, 요셉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위해서 요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구원 사역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고난 뒤에 행복이 온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어야 구원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죽음의 삶입니다. 나의 꿈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삶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을 위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위해 나를 버리는 자입니다. 성도는 죽고 죽고 또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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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