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산교회)
사자성어 중에 ‘여신동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하나님과 함께 가다(걷다)’입니다. 이 사자성어를 보시면 성경에서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이분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성경에 많이 소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에녹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 에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렇다면 에녹의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을까요?
창세기 5장 24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바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여긴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기를 원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의 성막과 성산에 거하는 자는 누구일까>
제가 오늘 시편 15편을 살펴보는데 먼저 성경 속의 에녹을 소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의 장막과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하는 주제를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은 이 주제에 관한 질문, 이 질문에 대해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제시한 대답, 그리고 결론적 진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핵심주제를 정교한 구조로 풀어낸 이 시편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은 본 시편의 핵심주제에 관한 질문으로 시를 시작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장막과 성산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곳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며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주로 성막이나 성전에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임재가 장막과 성산이라는 장소적 개념에 더 이상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도 시인처럼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행하는 자>
시인은 주제 질문에 대한 전체적인 대답을 2절에서 제시합니다. 2절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하나님의 장막과 성산에 거할 자는 바로 정직과 공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시인은 이에 대한 세부적인 답을 3절에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답들은 부정문 형식(~하지 않는다)과 긍정문 형식(~한다)이 교차되어 제시되고 있습니다.
3절은 부정문 형식입니다. 주의 장막과 성산에 거하는 자들은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4절 전반부는 긍정문의 형식입니다. 주의 장막과 성산에 머무를 자는 망령된 자를 멸시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합니다. 그리고 4절 후반부와 5절은 다시 부정문의 형식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서원한 것을 해로울지라도 바꾸지 않습니다. 이자를 위해 돈을 꾸어 주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마음이 정결하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과 성산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행위와 절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의로운 마음은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아니, 표현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걷는 자>
혹시 소요리문답 1문답을 아십니까? 제1문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입니다.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다시 바꾸어서 말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라!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라’라는 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의 더 자세한 의미는 하나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게 되면 그 인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다시 해석해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 정직과 공의를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비방하지 않습니다. 주의 장막과 성산에 머무를 자는 망령된 자를 멸시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합니다. 그들은 마음에 서원한 것을 해로울지라도 바꾸지 않습니다. 이자를 위해 돈을 꾸어 주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견고한 삶을 사는 자>
시인의 결론적 진술이 보여주는 것처럼 정직과 공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우리는 반드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정직과 공의가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정직과 공의를 행하려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요동치는 세상에서 그를 굳게 붙잡아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질문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시인의 질문이 바로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인의 답이 우리의 답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의 장막과 성산에 거할 자는 정직과 공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참이면 ‘정직과 공의를 행하는 자는 주의 장막과 성산에 거하는 자입니다’ 역시 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정직과 공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주의 장막에 성산에 거하면서 정직과 공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정직과 공의를 행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귀한 삶을 살아 갈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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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