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나아가라

(마태복음 4장 1-2절)
이남수 목사

하와이행복한교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33년을 사셨습니다. 33년을 사시면서 30년은 목수의 아들로 평범하게 사셨고 나머지 3년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며 사신 3년을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부릅니다. 공생애란 공적인 삶을 사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기도하신 후에 사탄으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고 이를 물리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때에’라고 시작합니다. ‘그 때’가 어느 때입니까? 그때가 어느 때인지 보려면 바로 위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때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하늘 아버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 할 메시야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이 첫 걸음을 시작하는 그 엄청난 순간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가겼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아주 강한 어조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로 몰아내심

2천 년 전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던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몰아내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풍성한 삶에서 빈약한 삶으로 몰아냅니다. 영광스런 자리에서 수치와 고통의 밑바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은혜의 자리에서 눈물 뿌려 기도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골짜기로 우리를 쫓아내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거친 광야로 몰아내실 때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은 예수님을 온전케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 이 시대에도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비록 우리가 원치 않는 광야로 우리를 몰아내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영적으로 강건하게 훈련시켜서 남은 세월동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한 나라의 왕자에서 쫓겨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한 후에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의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쓸쓸하고 삭막하고 눈물 섞인 광야생활을 거친 후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저와 여러분을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 영광 받으시며 쓰임 받는 일꾼이 될 줄로 믿습니다. 

 

광야에서 발견한 것

  두 번째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가시는데 광야라는 것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광야는 우리의 참 모습,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현대 신학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멀튼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착각 속에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산다.” 이 말은 현대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산다는 뜻입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자기 속사람도 좋은 인격인 사람인 듯 착각하고 명예가 있으면 그만한 인품이 있다고 착각하고, 사회적으로 인기를 얻으면 자기가 최고인 줄 착각하는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착각이 메마른 사막이나 광야에 가면 다 깨져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 홀로 서 있으면 누가 알아줄 사람이 있습니까? 광야 한복판에는 인기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나 하나, 연약한 인간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끔씩 도시 생활 속에서, 착각 속에서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을 광야로 이끄셔서 나의 참 모습, 나의 진실한 존재를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단계를 3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인간의 욕망단계입니다. 두 번째 이것보다 한 단계 높은 윤리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인간 실존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바로 영적인 단계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맡겨 드리는 영적인 실존의 단계,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의 은혜아래 사는 사람이 바로 영적 존재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단계의 삶을,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그냥 먹고 욕구대로 사는 1단계 생활입니까? 아니면 그보다 조금 나은 윤리적으로 그저 착하게 살려고 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솔직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내어 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속에 나를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사십니까? 여러분이 광야에 있을 때 고통과 근심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내 자신을 발견하고 내 모습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단계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지나다가 황금이 묻힌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그 황금을 주워 담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란 주머니에는 가득 찼습니다. 나중에는 담을 곳이 없다보니 물주머니의 물을 쏟아버리고 물 부대에 황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길을 떠났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태양은 뜨겁게 타오르고 갈증으로 목은 탔습니다. 이제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앞으로 보니 저 멀리 한 사람이 가죽부대를 지고 앉아 있는 것을 봤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사람은 이미 죽어있고 물주머니에는 물이 아니라 황금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더 이상 기운을 차릴 수 없는 이 나그네, 원망의 눈초리로 황금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답니다. 

 

결론

사람들은 광야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황금을 찾습니다. 가끔은 그 황금을 얻고 기뻐합니다. 그 황금을 담기 위해 생수를 다 쏟아 버리고는 그 속에 황금을 넣고 길을 떠나지만 얼마 못가서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광야 인생길에서 진정한 생수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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