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봇의 포도원

(열왕기상 21장 1-16절)

이영상 목사 (뉴욕중앙산정현교회)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서 좋지 못한 일을 행한 사례들을 봅니다. 신약에서는 초대교회 때 사도행전 5장에서 보는 것처럼 찰떡궁합처럼 마음이 맞아서 사도 베드로 앞에 이구 일성으로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습니다. 둘 다 한날에 성령을 속인 죄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합왕과 이사벨이 있습니다. 이 부부도 찰떡궁합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본장 2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아합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골라 가면서 많이 한사람도 없는데 그 이유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인즉 아내에게 푹 빠져서 아내와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마치 제안 같아 보이지만 왕의 제안은 백성들에게는 명령이 됩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고 말합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이스르엘'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아합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은 수도 사마리아로부터 38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잇사갈 지파의 아름다운 성읍이었습니다. 여기에 자리 잡았던 아합 왕의 별궁은 상아궁 이라고 불리울 만큼 호화스러운 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궁은 아모스 3:15에 보면 아모스 선지자의 주요 책망의 대상이 됩니다. 아합의 궁 곁에는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자기에게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구에는 몇 가지 이유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나봇의 포도원이 그의 궁실 곁에 있기 때문에 내가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져야 하는 둘째 이유는 그 포도원을 자신의 정원(나물밭)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조건은 만일 내게 주면 그 포도원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주겠다(왕상21:2)고 하였습니다. 이런 제안을 받을 때 첫 번째로 나봇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왕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행운을 잡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시한 조건들이 세상적으로 보면 그리 나쁜 조건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일국의 왕께서 그냥 뺏는 것도 아니고 충분한 보상을 주고 요구하는 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봇은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합왕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합왕보다 더 높은 분, 하나님의 명령이 이 일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나봇은 왕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아합에게 말합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하나님께서 금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왕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쉽게 보이는 한절이지만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왕의 명령을 단칼에 자르는 일이 분명히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권력 없는 일개의 농부가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안됩니다’ 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자 앞에서 거절은 우리가 살아가는 요즘 세상에서도 쉬운 일은 절대 아닙니다. 당시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엄청난 불이익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론 목숨마저도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신문의 뉴스 속에서 매일 만나는 부조리와 비리를 밥 먹듯이 저지른 사람들의 핑계는 항상 똑같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관의 명령이 있었고 처자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봇도 똑같은 환경과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상관인 왕의 명령이고 나봇도 가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봇이 안됩니다 라고 외친 이유는 왕의 왕이 되신 더 크신 왕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명을 따르면 많은 유익이 있고 신분상승의 기회도 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최고 명령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는 반드시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나봇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경제적 유혹 앞에 얼마든지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포도원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좋은 대가를 받고 팔 수 있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더욱이 나봇이 지존하신 왕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굉장한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를 몰랐던 사람도 아니고, 세상적 계산을 몰라서 거절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기에 세상의 바보가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나봇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포도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나봇이 세상에 오기 전에 벌써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레위기 25장 23-28절에 토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을 나봇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도달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가나안 땅의 영원한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인생(이스라엘)은 오직 우거하는 자요 나그네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만일 형제가 가난하여 땅을 어쩔 수 없이 팔았을지라도 고엘 제도를 통해 혈족 중에 잘사는 사람이 대신 무를 것이고, 그 조차도 없어서 무를 자가 없으면 50년이 되는 희년에는 반드시 그 땅이 본래 주인에게 되돌아가야 한다고 명백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가나안땅은 처음주실 때부터 땅의 소유주가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봇은 자기 포도원을 가리켜 ‘내 열조의 유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이 열조에게 주신 유업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포도원 주인은 본래 하나님 자신이신데, 그분께서 그 땅을 타인에게 돈을 받고 팔거나 다른 땅으로 대체하는 물물교환을 금지하셨다는 이유로 왕명을 거절한 것입니다.

나봇의 거절은 어떤 사회적 이유, 윤리적 이유, 경제적 이유, 정치적 이유 이상의 것입니다. 유업의 보존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앙적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도원은 단순한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의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포도원을 가꾸고 재배할 때 포도원은 하나님의 언약의 산물로서 언약에 동참하고 있다는 영적, 신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조의 유업을 지킴이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 관계가 성실하게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앙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조상의 유업은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봇은 포도원을 밟을 때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를 가슴에 지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나봇보다 사실 아합왕이 먼저 실천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이 포도원을 뺏지 못해 근심하고 답답하여 침상에 누워 식음을 전폐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이렇게 사람을 병들게 만듭니다. 탐심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결국은 자신도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아합왕이 가진 땅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합왕이 가진 땅에 비교하면 나봇의 포도원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조상대대로 가지고 있는 그 궁실 곁에 있는 조그만 포도원을 빼앗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는 아합왕의 모습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모습과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데 가지지 않은 것만 찾아서 없다고 불평하며 감사치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철이 덜든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면 안될 위험한 장난감을 사달라고 때를 쓰는 듯한 마음이 듭니다. 이 사실을 아내 이세벨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모략을 꾸밉니다. 먼저 아합의 이름으로 어인을 찍은 편지를 나봇과 함께 사는 그 성의 장로들과 귀인들에게 발송하였습니다. 그 편지 사연에는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국가적 공식 금식을 선포한 이유는 국가에 재난이 찾아왔는데 그 재난의 원인을 찾아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중대성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합왕이 병이 들어 누워있는데 이것이 국가적 재난이고 하나님 앞에 누군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러한 율법을 교묘히 악용했던 것입니다. 합법을 가장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악랄한 범죄였습니다. 사사기 20장에도 레위자손 첩의 죽음 때 금식을 선포하고 제비를 뽑아 하나님 앞에 묻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를 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승리를 합니다. 또한 여호수아 7장에도 아이성의 패배 때 온 백성이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이때에 아간이 제비뽑기에 걸려들고 결국 죽이고 나서 전쟁을 해서 승리합니다. 이렇게 금식을 하고 기도를 통해 국가의 재난을 만든 원인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미리 불량배 두 사람을 세워 증인을 만들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고백하도록 각본을 짰습니다. 이세벨은 나봇을 죽이기 위하여 이렇게 교묘히 하나님의 율법을 악용한 것입니다. 마침내 이세벨의 악행은 온 이스라엘 앞에서 실행되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라는 두 비류의 증언과 함께 성 밖으로 끌려나왔고 거기에서 무리들이 돌로 그를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열왕기하9장 26절을 보면 나봇 뿐 아니고 그의 자녀까지도 돌에 쳐 죽임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포도원의 상속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갈 계승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아합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전통을 파괴하는 역사의 난동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본문 10절에는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13절에는 ‘성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라고 하였습니다. 14절에는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고 16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봇의 죽음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도 나봇의 죽음을 안타가워 하는 것같이 반복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나봇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준다는데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데 죽기는 왜? 죽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나봇이 단순히 자신의 재산을 못된 왕에게 지키기 위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재산을 지키는 개념이었다면 나봇은 왕에게 자신의 포도원을 주고 더 큰 재산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그는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기록한 성경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나봇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포도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포도원이 있습니다. 나봇처럼 어떤 유혹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포도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합은 우리를 위협하는 대적입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세상의 부귀와 권세와 물질을 더 많이 주겠다고 우리를 유혹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10월 마지막 주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전해진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개혁자들의 순교의 피가 뿌려져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개혁자들에게 아합 같은 대적은 교황과 교황과 손잡은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합보다도 더 절대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이들에게 일도 아니었습니다. 부관참시라고 불리우는 죽은 사람을 꺼내어서 다시 불태우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한번만 아니라고 말하면 평생을 호강하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순간도 있었지만 끝까지 진리의 편에 서서 개혁자의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개혁자라고 자신을 거창하게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진리의 편에 서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매한 성도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불러주셨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고통도 핍박도 진리의 편에 서있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개혁자들이 못다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 시대에 개혁자들입니다. 교황같은 대적은 없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합니다. 이단들의 말씀에 대한 왜곡도 우리의 대적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나봇의 포도원이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이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교회와 복음의 왜곡을 지키는 사명이 우리에게는 나봇의 포도원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가자는 유혹도 있고 세상을 따르라는 위협도 있지만 진리의 편에 서서 주님 주신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는 오늘의 종교 개혁자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sang78u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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