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목사 (승동교회)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가 매우 사랑했던 성경입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책들 가운데서 갈라디아서를 최상의 책으로 여겼습니다. 루터 당시의 카톨릭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얻는다는 사실을 루터가 발견하게 된 것은 바로 갈라디아서의 깊은 연구를 통해서였습니다. 흔히들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영적 자유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spiritual liberty), “종교개혁의 구호”(the battle cry of the Reformation), 또는 “기독교인의 독립선언문”(the Christian's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천주교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갈라디아서의 구약적 배경이 되는 말씀은 합2:4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약에 세 권의 성경이 쓰여졌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입니다. 세 성경 모두가 합2:4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세 서신 모두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로마서에서는 의인에 대한 설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에 대한 설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우리가 잘 아는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이 있습니다. 한편 이제부터 우리가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하는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에 대한 설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골격을 말씀드리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1-2장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3-4장입니다. 교리편입니다. 여기서는 오직 믿음만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길임을 강력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셋째, 5-6장입니다. 실천편입니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이 살아 가야할 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1장 1-3절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에, 먼저 보내는 사람을 밝히고, 그 다음으로 받는 사람을 밝히고, 그 뒤에 간단한 인사말을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바울도 이 관례에 따라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은 먼저 발신자가 바울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은 수신자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절에서는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자신에 대해 소개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그토록 강한 어조로 변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기 때문에 명예의 회복을 바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자신이 전한 복음이 거부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라는 말이 본시 무슨 뜻입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셨으니까, 바울은 누가 무엇이라 해도 예수님의 사도가 분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직분, 우리의 사명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실하고도 충성된 일군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자신과 함께 하는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고 단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이라고 간단하게 서술했을까요? 바울은 거두절미하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만큼 절박하고도 급박한 상황에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의 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입니다. 다른 서신들과의 차이점은 다른 서신들은 어느 지방에 있는 한 교회에게 보낸 것인데 갈라디아서는 그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로마서는 로마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또 고린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한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방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데, 이 여러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바울의 서신을 읽도록 보내진 것입니다.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내륙지방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가 포함됩니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했는데 갈라디아 지방에서는 제1차 전도여행 때와 제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행14:19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루스드라는 바울에게 끔찍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두 번 다시 루스드라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또 다시 루스드라에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에 따라 바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복음을 전했습니까?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 말씀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또 다시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만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구원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평강은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는 언제나 은혜가 평강보다 먼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게 되면 그 뒤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심령에 평강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평강의 출처인 동시에 조건을 표시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사말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바람을 피력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 요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위에 든든히 서서 평안함을 누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심령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좌절감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잘못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러니 가다가 혹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내게 용서를 빌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내가 너를 다시 세우리라.”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은 절로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늘 충만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