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종진 목사 (남서울중앙교회 원로)
‘타성’(惰性:force of habit)이란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입니다. 이같은 타성은 크리스천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주님의 수난에 대한 감동까지 무뎌지게 만듭니다. 이탈리아의 성직자로 잘 알려진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Saint)의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가 아씨시의 근방의 들길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사람이 “아니, 너는 왜 그렇게 울고 있니?”라고 묻자, 그는 눈물을 닦으며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고 울고 있어요.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땅 끝까지 갈지라도 결코 부끄럽지 않을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결심한 그의 결연(結緣:resolute)한 신앙자세는 그로 하여금 일생을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로 역사에 길이 남게 한 꺼지지 않는 신앙의 불길이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한 사실을 깨닫는 자들에게 굳이 다른 교훈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세계적인 설교가 영국의 스펄전 목사도 그의 임종시에 “나는 이제 신학을 네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타성에 젖은 국민성,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앙생활 모두가 우리를 영적으로 민족적으로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2017년도에도 ‘고난주간’을 기하여 특별새벽기도회를 선포하고 교회마다 ‘가정과 교회’, ‘나라와 민족’의 회복을 위한 기도운동을 전개하면서 다시 한 번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던 예수님도 인류 구속의 대역사를 위하여 잡히시기 전날 밤, 밤이 맟도록 더욱 더 기도로 준비하셨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힘을 도왔습니다(눅22:39-46). 그러므로 처참한 십자가상의 죽으심도 복종으로 일관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으며, 모든 무릎으로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Lord)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5-11).
본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민중들의 압력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형이 확정되었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로마 군병들로부터 받으신 희롱, 한때 이적을 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수많은 군중들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퍼붓는 조롱과 비방,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희롱. 심지어 강도들까지도 욕하는 등 최악의 수치와 고통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고난 앞에 또다시 머리 숙여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와 감사의 두 손을 모으고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다짐으로 거듭나시기를 소망합니다.
1. 메시야의 고난은 수치와 모욕, 능욕과 조롱, 그리고 멸시와 천대의 고난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인자로 오신 예수. 그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사53장)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려고 당하신 벌거벗김의 수치와 모욕,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정결케 하여 구원하시려고 홍포를 입으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당하신 능욕과 조롱, 채찍에 맞으면서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얼굴에 침 뱉음을 받았고, 왕의 홀을 대신하여 갈대를 손에 쥐어주기도 하고, 도로 빼앗아 그 갈대로 때리며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 모든 고통과 고난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가혹하고도 야만적인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통치자이심을 확증시켜주신 고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아멘.
2. 메시야의 고난은 하나님 사랑의 극치요, 인류 구원 성취를 위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아멘.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죄 용서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십자가 피는 화평을 이루게 하셨고(골1:20), 하나님께서는 그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간과(看過:remission)하셨으며(롬3:25),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셨습니다(롬6:6). 뿐만 아니라 죄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단번에 자유하게 하셨습니다(갈3:13). 이처럼 죄와 사단과 세상에서 구별하여 불러내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 하나님께 ‘Amazing Grace!’를 불러 영광과 찬양을 올리십시다.
3. 메시야의 고난은 승리와 영광의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승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관심은 현세의 삶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메시야 고난의 진의(眞意:the true meaning)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눈도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시야의 십자가 고난은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고,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엡2:18,19).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을 안겨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죄악의 세력을 이기셨고, 불의와 불법을 이기신 주님의 위대한 승리와, 최고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선포였습니다. 비록 인간에 의한 십자가였으나 부활 승천의 승리요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주를 위한 고난과 수고로 어려움이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일평생을 복음을 위한 전도자로서 온갖 환난 속에서도 담대했던 사도 바울 역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 부활절 주일을 앞에 두고 있는 사순절기간으로 지키는 엄숙한 기간입니다. 성육신하신 메시야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작은 마음으로 보다 경건하게, 그리고 절제된 생활과 거룩한 삶으로 승화(昇華:sublimation)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최후의 영광된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