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장막을 일으키리라

(아모스 9장 11-12절)

김홍석 목사 (뉴욕늘기쁜교회 담임)

다윗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인정받고 사랑을 받았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 받았던 조건이 무엇이었을까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그 질문에 한결 같이 다윗은 ‘예배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1-1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무수한 제물들을 하나님께서 필요 없으니 내게 가져오지 말라 하십니다. 그걸 가져오면서 내 마당만 밝고 가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고 하나님이 싫다 하십니다. 왜 일까요? 내용 없는 형식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때, 드리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건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인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그래서 우리가 예배의 성공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한 주일에도 여러 번 예배를 드립니까? 드릴 때마다 우리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신실한 그런 나라를 이룰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당시에 솔로몬 성전도 있었고, 실로의 성소도 있었고 모세의 회막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 시대도 솔로몬 시대도 모세 때도 다 지났습니다. 그런데 유독이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마 다윗에게는 뭔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그런 비밀이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무엇이 다윗에게만 있는 특징이었을까요?

첫째는 예배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시편 42편1절에 보면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 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슴은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물 찾는 것 외에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한 것’은 ‘주님 아니면 나는 죽음입니다’ 이런 열정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이런 열정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열정이란 하나님 사랑과 연결됩니다. 그 사랑의 열정으로 예배드리느냐에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32편 3-5절에 하나님의 법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보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도 침상에 들어가지도 눈을 감지도 않으리라는 열정이 있습니다. 이 예배에 주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필라델피아 영생교회 후임으로 오신 선교사님이 인도네시아에서 20년 이상을 사역하시는 중에 있었던 그의 간증입니다. 무슬림 폭도들이 우리 개신교회들을 방화했던 일이 있어서 그때 42개 교회가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두 교회는 건재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두 교회에는 목사님과 예배드리며 끝까지 저항하는 중 폭도들이 방화를 시작하며 모두 나오지 않으면 불로 없애 버리겠다고 위협에도 당당히 맞섰답니다. 폭도들이 물러가지 않고 더 열을 내며 방화를 시작하는데 조금 전까지 사용했던 휘발유에 불이 붙질 않았답니다. 하나님께 예배로 이겨낸 간증을 들으며 지금도 이런 열정으로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시는구나 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이 열정이 여러분들의 예배 가운데 항상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가까움, 친밀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와 아니, 나아오는 것이 하니라 늘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위기나 고난의 상황 가운데 아니 아주 통쾌한 승리 앞에도 하나님이 하셨음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23편 말씀처럼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정도로 말입니다. 사무엘하 5장 19절에는 블레셋을 치는데 하나님께 치러 올라갈까요 말까요 하는 친밀함도 보여집니다. ‘눈물의 운동회’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어느 교도소에서 제소자들에게 일년에 일차씩 운동회를 열어 주었답니다. 교도관들이 이벤트로 마지막 날 마지막 경기는 효도 달리기라 해서 부모님을 업고 달리는 경주랍니다 출발신호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는데 아무 제소자도 부모님을 업고 달리려고 하지를 않는 이색 풍경이 벌어졌답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과 헤어져야 하니까 마치 누가 늦게 골인하느냐 하는 경주인양 운동장엔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함께하는 임마누엘이 이 친밀함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더 같이 하고픈 그런 친밀함 우리의 예배 가운데 회복되시길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는 반응이 있는 예배입니다.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루고 처음 시행한 일은 빼앗긴 법궤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오벳에돔의 집에서 모셔오는 날 다윗은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자기 바지춤이 내려가는 것을 모를 정도로 기뻐했던 그런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배의 시작은 예배드리고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면서부터가 진정 예배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삶 아니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 있는 예배,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예언하신 “너희가 내 마당만 밟고 갈 뿐”이라는 즉 형식만 있지 내용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저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시는 줄 압니다.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종교개혁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예배를 회중에게 돌려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이 예배드리고 회중은 구경하는, 그래서 아마 예배 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예배자입니다. 다윗과 같은 열정으로, 친밀함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예배,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살아있는 예배, 다윗이 드렸던 그래서 다 없어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일으키시고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섬기시는 가정과 교회위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hongskim1623@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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