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청지기(Shrewd Manager)

(누가복음 16:1-15)

황기호 목사 (윌셔연합감리교회)

예수님의 비유는 늘 간단명료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이해하기는 쉬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지혜로웠다고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훑어보아도 칭찬할 구석이 없어 보이는 불의한 자를 지혜롭다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주 이상하고 또 못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셨기에, 그 청지기가 잘한 짓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게을렀을 뿐 아니라 청지기로써의 본분도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돈을 마음대로 쓰다가 결국 주인에게 파면조치를 받은 것 아닙니까? “빨리 잔무를 정리해서, 셈을 끝내고 떠나라!” 해고선언을 받은 청지기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청지기직을 빼앗겼으니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러다가 기발한 생각을 하나 생각해낸 것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있는 힘과 기회를 사용해서 주인의 집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결국 자기 주인에게 빚지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불러서 그들에게 특별 감면조치를 취했습니다. 기름 100말을 빚진 자에게는 60으로, 밀 100석을 빚진 자들에게는 80으로 증서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빚진 자들에게 그렇게 관대함을 베풀고 그들의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 청지기를 잡아다가 감옥에 넣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가 앞으로 닥쳐올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지혜 있게” 처신했다고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것을 들어, 이 세대의 아들들, 곧 불신자들이, 빛의 아들들, 곧 믿는 자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지혜롭다고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

돈이나 재물에 관한 이야기에는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생활이 침해받는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다고 일단 마음을 닫아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참고 듣기는 하지만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듣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나 같이 돈이나 재물이 적은 사람에게 할 것이 아니라 돈이 좀 많은, 그래서 넘쳐나는 다른 누군가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그냥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이나 재물에 관한 이야기를 싫어하거나 비웃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돈을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들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주어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문제라고 선언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국 우리의 운명,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는 하십니다.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그 돈이라고 하는 것과 재물에 연연해하는 것을 아셨기에, 38개의 비유 중에 16개나 되는 비유를 돈이나 재물을 들어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은 늘 문장 앞뒤를 살피면서 읽어야 합니다. 즉 16장 전체가 말하는 맥락에서 본문을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실제로 본문 앞뒤를 살펴보아도 전체적인 주제는 일단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바리새인을 가리켜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도 실은 그 배경에 재물과 돈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돈이 남아돌았던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생명을 부지하면서 어렵게 살았던 거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전혀 다른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즉 잠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영원한 삶에 들어가면 그 돈이 전혀 무기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영원히 거하게 될 그 처소, 그 곳은 바로 거지 나사로가 안긴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곳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불의한 청지기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그는 이웃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 것이 다릅니다.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이 훗날 자신에게 큰 버팀목이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자족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훗날에 나사로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비유를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구제와 구호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가 시키고 말고도 없고, 누가 본다고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꼭 그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라서 그런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휴머니즘이 없다면, 그리스도인 이전에 사람으로써의 도리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비유들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실제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16장 9절에서 끝나고, 이어서 예수님의 몇몇 경구가 10-13절에 나옵니다. 앞부분이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내용이라면, 뒷부분은 충성된 청지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불의한 것과 충성스럽다는 것이 ‘지혜롭다’는 말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뒷부분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0절은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한다는 말씀이고, 11절은 불의한 재물에 충성된 자라야 참된 것도 맡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12절은 남의 것에 충성되지 않으면 자기의 몫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즉 세 구절 모두, 충성하는 청지기에 관한 구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충성, 즉 얼마나 신실한가로 그 초점이 옮겨갑니다. 즉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한 마디로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재물로 운영됩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세상의 재물의 삶에서도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도대체 ‘재물에서 충성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질문이 남게 됩니다. 13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6장 24절도 똑같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누가와는 조금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태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입니다. 즉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가르침과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가르침을 앞뒤로 놓고 그 중간에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누가와는 그 배경이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뜻입니다. 즉 누구든지 크리스천이라면 마치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하인을 충성스럽다고 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도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씀이 이 세상의 삶에서 충성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영원하고 참된 것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경고의 말씀이 있는 것을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통 신자들을 헌금만 잘 드리면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본문은 사실 그런 헌금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헌금은 교회 운영과 복음 전파를 위해서 믿는 사람들이나 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물질적인 헌신인 것입니다. 그러니 십일조와 같은 것을 제대로 드리지 않는 것은 실질적으로 교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거나 사람들이 볼 수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잘 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을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고민은 과연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에서의 그런 경쟁을 부추기는 설교들도 많습니다. 기도도 전투적으로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잘 드리면 축복을 받는다고 외칩니다. 이제는 ‘예수 축복, 불신 실패’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 생활이 시원치 않은 사람 취급 받기 일쑤입니다. 그렇습니다. 축복이라는 것이 온통 돈이나 재물의 많음으로 고정되어 버렸습니다.

문제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똑같이 돈에 붙들려서 살아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실은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거나, 재물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을 섬기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섬긴다는 것은 그것의 종이 된다는 뜻인데, 종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같이 돈이 세상을 지배하게 놔두거나 돈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돈의 종이 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즉 돈을 소유하면서도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니 가능하면 돈을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돈과 재물의 주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로웠다는 말을 들은 것도 실은 그가 돈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돈을 사용한 것이 그렇습니다. 물론 돈을 다스리는 것, 그것과 완전히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내 삶에서 돈이 지배하는 영역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반대로 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그것에서 자유 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는 순간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죽음은 사실 그 돈이 무능력해지는 순간이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가 되는 순간입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실은 우리는 그런 삶을 당겨서 살기로 작정한 것인데 그 사실을 다시 기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재물이나 돈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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