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장로교회)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Life is Chioce between Birth and Death”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실제로 태어나서(birth) 죽을 때(death)까지인데, 그 사이에 들어가는 알파벳은 C 글자 밖에 없어요. 그 C가 뭘까? 선택(Choice)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실제로 매일 일어날까? 말까? 부터 시작해서, 뭘 먹을까? 누구를 만날까? 매일의 삶은 다른 말로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이 인생을 결정짓게 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매우 친한 두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들은 서로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용히 저녁 강둑을 걷고 있었습니다. 조금 가다가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한 길은 강둑을 따라 계속된 길로서 주위에 과수원이 있고,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한 길은 언덕 위로 난 길로서 올라가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면서 언덕 위의 번쩍이는 불빛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강둑을 따라 산책하기 좋은 길로 가자고 했고, 다른 친구는 언덕 위의 불빛이 보이는 길을 가자고 서로 권하다가 다정했던 두 친구는 그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강둑길을 선택한 친구는 가는 내내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은 그 친구를 원망하며 걸었으며, 가는 길에 길 옆 과수원에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먹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몰래 하나씩 따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막상 먹어보니 과일 맛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그이후로 그는 몰래 훔쳐 먹는 흥미를 갖게 되었고, 남의 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도둑질을 하다가, 결국 어떤 집 주인에게 들켜 주인을 살해하는 죄까지 범하였습니다. 사형수가 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가 어느 날 감옥 안에 들어온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신문 1면에 웬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오래전에 두 갈림길에서 서로 엇갈린 채 헤어졌던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당시 언덕위의 불빛은 다름 아닌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나오는 불빛이었습니다. 그날 그 친구는 주님을 영접했고 그 후 삶이 즐거움으로 바뀌었으며,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와 총장을 역임하고 유능한 정치인이 되었다가 그가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사람이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아브라함 가필드 대통령입니다.
인생의 삶 속에서 때로는 산길이나 험한 길, 계곡의 길, 황량한 광야의 길을 걷는 것보다 더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해야할 길은 “두 갈래 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평탄한 길이냐? 고난의 길이냐? 아니면 황금의 길 붉은 양탄자의 길이냐? 악취 나는 도랑과 같은 길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갈래 길입니다. 길의 선택은 그 결과를 결정짓는데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옳은 길이라고, 많이 간다고 생각 없이 따라 갔다가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것은 오직 모든 앞일을 가장 완벽하게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생명과 소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5장부터 말씀하시다가 7:13절부터 산상수훈의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산상수훈을 4가지 은유적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1)13-14에서 좁은 문과 넓은 문의 은유적 말씀 2)15-20절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은유적 말씀 3)21-23절은 주여 주여 입으로만 하는 자와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은유적 말씀 4)24-27절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은유적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4가지 은유적 말씀은 모두 종말론적 심판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인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누가복음)에 대한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1. 좁은 문-결단과 삶의 변화 실천 산상 수훈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신 첫 번째 은유의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 대해서 구경하고,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설교와 강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강의의 결론은 지식의 습득에 있고, 설교의 결론은 구체적인 삶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해준 강의는 잘한 강의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아무리 훌륭하고 감동적이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삶의 결단과 변화가 없다면 잘못된 설교입니다. “좁은문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의 결론도 구체적인 실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말씀을 듣고 그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범하는 넓은 문이라면, 너희는 말씀을 듣고 그치지 말고, 결단하고 삶 속에 실천하는 구별된 자(좁은 문으로 가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해줍니다. 말씀을 듣고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길로 계속 나아가든지, 이제는 말씀대로 변화된 삶을 살도록 하는 길입니다. 넓은 문(넓은 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가는 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결단과 변화가 없이 살아가면 그냥 넓은 길로 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넓은 문(넓은 길)은 바꾸어 말하면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인생을 흘러가게 하면 “표류하는 인생” 표류하는 길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좁은 길)이란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내버려두지 않고 결단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변화를 싫어합니다. 특별히 속사람은 더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고방식도 생활습관도 바꾸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은 은행계좌를 한번 만들면 아무리 다른 은행에서 이자를 많이 준다고 해도 거래은행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지내온 습관들에 대해서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좁은문”의 말씀은 아무런 변화와 결단이 없는 삶이 신앙을 방해하는 최고의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연속극이나 영화보고 인생의 작전이 바뀌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인생의 작전이 바뀌어야 합니다. 넓은 길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도 결단도 필요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가던 습관대로 가면 그게 넓은 길입니다. 조금 불편해도 의식적인 행동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 좁은 길입니다. 날마다 그냥 이대로 살지 마시고, 말씀으로 조금 불편해도 결단하고 변화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 좁은 문-길과 생명되신 예수 두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길의 결론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앞에 4거리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중의 하나는 아스팔트가 잘 깔려있고, 정리 정돈이 잘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길은 나무로 우거진 멋진 길이고, 그늘이 져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여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또 하나의 길은 황금으로 깔려있는 럭서리한 길입니다. 또 하나의 길은 이게 도대체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이 울퉁불퉁하고 길같이 보이지도 않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 4거리 가운데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길의 모양과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향한 길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부산으로 목적지를 정했으면 그 길이 고갯길이냐? 평탄한 길이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에 닿아있는 길로 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났으니까 그냥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이 가니까... 그 목적지가 어디냐?를 묻지도 않고 그냥 표류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가는 길이 편안하고 넓고,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즐기면서 선택하여 갔는데, 그 목적지가 멸망과 지옥이라면 그 길로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가기에 조금 힘들고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도 “그 목적지가 생명에 이르는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신 것은 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로 가득하게 하시고, 동산 가운데에는(어디서도 빨리 와서 먹을 수 있는 곳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택한 열매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쫒아내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막아놓으셨습니다. 즉 죄인이 결코 영생의 길을 갈 수 없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이 땅위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영생의 길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막으신 영생의 길은 좁은 길도 아니고, 막힌 길이었습니다. 요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며 생명의 길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헛된 수고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이렇게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생명을 향한 좁은 문, 좁은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내용을 오해하고 좁은 문, 좁은 길을 힘들게 핍박을 당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을 좁은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휴가도 안가고 평생 성수주일하고, 1년 365일 아파도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남들보다 많은 시간으로 봉사하는 것을 좁은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모 기독교 신문에 연재되었던 ‘어느 맹 집사’의 하루라는 만화에 보면, 하루 종일 유명한 절간을 다니면서 한밤중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불상마다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고 도망 나오는 것을 십자가의 길, 좁은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좁은 문은 분명히 생명에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때에 일어난 기이한 현상중의 하나가 성전의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막으셨던 생명나무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괴로워도 율법을 지키고, 선행과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 좁은 문이 아니라,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만이 영생으로 향한 좁은 문이 됩니다.
3. 좁은 문-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 좁은 길의 선택이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전도사 때에는 넥타이가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 때에는 고민할게 없어요. 매일 그것만 매고 나가면 되요. 그런데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지금은 수십 개가 되니까 아침마다 무엇을 선택하여 매야 어울릴까? 고민이 많습니다. 옷이 한두 벌밖에 없는 여성들은 매일 아침마다 고민할게 없어요. 그런데 옷이 옷장에 수십 벌 수백 벌로 가득하면 매일 아침의 선택이 괴롭습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의 선택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1)룻기에 나오는 선택입니다. 나오미의 두 자부 오르바와 룻은 모두 그 남편들인 말룐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두 자부에게 나오미는 각자 자기 민족에게로 가서 새로 출발하라고 권할 때에, 오르바는 모압 자기 땅의 새 남편을 구하여 살 길을 선택하였고,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의 선택하였습니다. 룻의 삶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이삭줍기를 하며 겨우 겨우 살아갔지만, 하나님 선택의 결과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와 다윗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으로 세워집니다.
2)창세기 13장에 보면 롯과 아브라함의 선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이 서로 헤어질 때에 롯은 물이 넉넉하고 풍성하게 외적으로 보이는 풍성한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고,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과 그 언약의 축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소돔과 고모라 땅의 심판과 더불어 고통을 당해야 했고, 하나님을 택한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집니다. 예레미야 2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놓여있습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다고 해서 평탄한 길, 욕을 안 먹는 길을 택하지 마시고,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하시고, 하나님을 택하십시오. 오늘날 나를 포함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생명과 진리의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욕 안 먹고, 심신이 편안한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에 계셨던 이 모 집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집사님이 총각시절에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였는데, 친구 동창들이 연휴가 되는 주일날 놀러가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모두 놀러갔고, 자기는 교회 주일학교 교사라서 빠질 수가 없어서 주일날 봉사를 마치고 춘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열심히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연휴에 일찍 놀러가기로 한 것을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이 주일날 봉사를 마치고 저녁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트니까 특별 뉴스가 나오는데 주일 오후에 춘천에서 보트에 탔던 사람들이 사고를 당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뉴스입니다. 그리고 그 사망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자기가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두 익사자 명단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갔더라면 그날 오후에 틀림없이 그 배를 타고 있었을 텐데...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놀러가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집사님은 평생 두 갈래 길에서 망설임이 없이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 길은 결코 우리의 앞길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지혜롭고 승리하는 길이 되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마다 선택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심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vdk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