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종 목사 (벧엘교회 담임)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어떤 중범죄를 지어서 옥에 갇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행21:28-29). 감옥에서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만도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가장 먼저 찬송시(엡1:3-14)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사람을 향한 원망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입술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찬송시와 축복 에베소서 1장 3절은 14절에 이르는 바울의 찬송시의 첫 구절입니다. 불란서의 신학자인 리온네(S. Lyonnet)는 이 구절을 ‘바울의 축원문’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된 이 긴 구절은 마치 쉼 없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축복하고자 했던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 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안에서”라는 전치사를 세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기원하는 축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저는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 기원했던 이 축복이 오늘 모든 성도들의 삶에도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기원한 축복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복 안에서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기를 기원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엔 파세 율로기아 프뉴마티케” 인데 “모든 신령한 복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기원하는 축복은 세상적인 물질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당시 에베소 주민들은 아데미 여신을 섬겼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에베소 주민들은 물질적인 복, 건강의 복, 자손의 복 등 현세적인 복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간구하는 복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축복과 같은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신령한 복 안에서” 하늘의 복을 누리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어떤 형량이 구형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땅에서 자유나 풍요가 아니라 영원하고 신령한 복을 사모했습니다. “신령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케 입니다. 이 단어는 성령을 의미하는 프뉴마토스와 관련된 것인데 그래서 샤프(P. Schaff)와 레잉(J.P. Lange)은 “신령한 복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와 은사를 의미하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성령께서 효력 있게 역사하셔서 허락하시는 중생의 축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은 3장 5절에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니라”(개역성경)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영생의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둘째,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받기 원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축복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후사가 되어 하늘과 땅의 신령한 상속자들이 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를 기록하면서 36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또 하나의 축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종, 문화, 언어, 계급 등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누리게 되는 온전한 연합의 축복입니다(엡1:10; 2:13-18).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상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의 조상으로 부터 발생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합과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사역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이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인종적, 사회적, 계층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역을 펼쳐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목적이요 계획인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 안에서 셋째,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늘에 속한”(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복을 받기 원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그 하늘 안에서” 복받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신학자인 회너(H. Hoehner)는 본래 “헬라어의 하늘은 우라노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바울이 사용한 에푸라니오스는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하늘의 보좌에 속한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너는 이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속한 권세를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도록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영적인 권세(마16:19)로 어둠과 죄를 다스리고 영적인 전쟁에 승리하도록 축복하는 기도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에베소 성도들이 하늘에 속한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하는 기도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두 가지 관점은 4장 이하에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윤리적인 코드를 제시하는 부분과 6장에 영적전쟁에 관한 교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 성도들의 삶 속에도 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이시라! 그런데 3절의 헬라어 본문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3절 한 구절에만 율로게오(복)라는 단어가 세 번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을 보면 두 번은 복으로 번역했는데 한번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율로게토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율로기아)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율로게사스)” 첫 단어인 율로게토스 역시 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절의 첫 세 단어인 “율로게토스 호 떼오스”는 ‘하나님은 복이 되시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Blessed be the God”(ESV, KJV, NASB 등)이라고 번역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14절에 이르는 긴 찬송시의 첫 구절을 장엄한 선언으로 열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을 섬기고 다양한 우상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 현세적인 축복을 구하지만, 성도들은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할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축복이십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구해야 할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입니다.
다윗은 그일라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고도 사울의 추격을 받을 때 그 주민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고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삼상 23:1-14). 그일라의 견고한 성과 성문을 의지하여 숨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숨기 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축복이 되셨습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참된 축복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복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danbaeq@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