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

(고린도후서 6장 8-10절)

김광삼 목사 (동문교회)

이 세상에는 겉과 속이 다르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있다. 반면에 아무 것도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대단한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현상과 실제가 다른 사람들이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현상과 내용이 다르다. 그런 것 같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1.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모습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있는 것 같으나 없다. 된 것 같으나 된 것이 없다. 아는 것 같으나 아는 것이 없다. 그렇게 보일을 뿐이다. 인격자인줄 알았는데 너무도 아닌 사람이 있다. 행복한 것 같으나 불행하다. 마치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과 실제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줄 알았는데 암에 걸려 있는 줄도 몰랐다. 남들이 볼 때 부럽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는 행복이 없고 불행한 사람이 많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없는 자 같으나 있어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남들이 모르는 신령한 기쁨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도와주며 산다. 10절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그래서 그들은 범사에 만족한다. 행복감에 넘쳐 살아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이런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2.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우선 자족(自足)할 줄 아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이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이렇게 간증하고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마음,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행복의 비결이다(빌4:11-12). 중요한 것은 행복감이고 만족감이다. 그러한 감(感)이 있어야 한다. 영적 감성이 좋아야 한다.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은 만족한 삶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족을 느끼는데 있다. 불행도 마찬가지다. 결핍하기 때문에 오거나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 결핍하다고 하는 불만, 불평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재산이 부족해도 만족할 줄 알 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가지면 더 갖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니, 조금 부족할 때 오히려 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기에 좀 부족한 외모가 더 행복하다. 완전한 외모는 질투의 대상이 된다. 완전한 외모를 추구하여 성형 수술하다가 더 망가진다. 부족한 외모에 자족하면 행복하다.

명예도 그렇다. 100%로 알아주는 명예보다는 어느 정도만 알아주는 명예에 행복이 있다. 오히려 나의 나됨보다도 더 크게 알아주면 부담스러운 것이다. 힘도 그렇다. 겨루어 한 사람 이길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1당 10명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조폭이 될 가능성이 많다. 적당한 인기가 좋은 것이지, 모든 사람이 환호하고 인기가 너무 올라가면 위험한 것이다. 절반 정도의 인기, 부족한 듯 한 외모, 절반 정도의 말솜씨, 절반 정도의 건강, 절반 정도의 교회, 좀 모자란 듯 한 것에 매력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이다. 완전한 행복, 완전한 건강, 완전한 남편, 완전한 아내, 완전한 교회 완전한 음식, 완전한 설교, 완전, 완전을 찾다가 여기에 함정이 있다. 완전한 신앙을 찾다가 이단에 빠진다. 좀 모자란 가운데서도 자족할 줄 아는 비결을 터득해야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지혜이다.

그렇다. 부족한 가운데 행복이 있는 것이다. 성도의 행복이란 부족한 가운데서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성도의 행복이고 성도의 아름다운 삶이다. 본문 10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앞으로 가질 것이 아니라, 현재 그렇다 는 말이다. 모든 것을 정말 가져서가 아니다. 현재 만족감에 넘쳐 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 그의 현실적인 모습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본인은 남들이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 있다. 새로운 가치관과 내적, 영적인 존재로서의 풍요함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스스로 만족하고,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마음,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줄 아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볼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세계에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하면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행복과 만족과 감사가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보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래의 소망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행복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영원지향적인 가치관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

주 안에서의 풍요의식, 자족하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 그래서 “지금 이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고 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 행복자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에 행복이 있다. 이러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한 분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해보니 참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복(福)된 자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에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다 버렸다.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영생을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은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모든 것에서 감사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행복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옛날 어느 목사님이 쓰신 작자 미상의 시가 있다.

“나의 자랑, 나의 삶의 잔”

옷을 잘 입었다고 하여 그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요/남루를 걸쳤다하여 그것이 또 나를 부끄럽게 못하누나. 남이 나를 칭찬하여 흥이 날것 없고/남이 나를 욕한다하여 그것이 나를 분하게 못하누나/다만, 주님 계시어 만사가 은혜요. 기쁨이로다. 주님 안 계시면 백사가 저주요 슬픔일 것이니/나의 생활의 맛이 오직 주님께만 있도다. 오 나의 생의 맛이 되시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 고생스럽거나, 평안하거나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살거나, 죽거나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그러면 모든 것이 다 의미 있고 생명이 있겠나이다. 세상으로 더불어 웃는 생활보다 주님으로 더불어 우는 생활의/그 눈물이 오히려 맛이 있나이다. 세상으로 더불어 잘 먹는 것보다/주님과 함께 있어 굶고 주림이 오히려 저에게 복이 되옵고 세상과 친하여 비단 옷에 싸여 사는 것보다/주님과 친하여 베옷과 헌옷을 입어/오히려 이것이 영광이로소이다. 오 주여!/당신만이 나의 구주시오니 주 외에 달리 무엇을 구하오리이까? 주님 한 분을 얻어 나는 모든 것을 얻었사오니/주님은 곧 나의 총 재산이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로소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활의 잔이 주님 앞에 그대로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성도란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 안에서 풍요의식으로 사는 자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내 자신이 정말 행복하면 상관없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면의 세계가 행복하고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으로 인한 풍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감사와 만족이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기쁨과 행복자로 살게 되며,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신비로운 기쁨과 행복이 넘치시기를 축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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