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꾸라

(마태복음 15:21-28)

호성기 목사 (필라안디옥교회)

믿음이 좋으신 집사님 부부의 딸이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봄 방학 때 잠깐 와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최고의 명문대학의 기숙사에 룸메이트가 미국 부잣집 딸입니다. 주말에 방문한 미국인 학생 부모님이 떠나면서 자신의 대학 신입생 딸에게 콘돔을 한 박스 선물하고 가더랍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집 떠나있으니 분명히 섹스를 하게 되는데 병에 걸리지 말라고 부모가 대학 1학년생 딸에게 콘돔을 선물하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Why not? 충격은커녕 당연히 받아들이는 미국 사람들이 많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격입니다. 우리 집사님의 딸이 ‘요즘 부모님들이 무엇을 믿고 자녀들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 대비도 없이 대학에 보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라고 하는 말이 가슴에 먹먹하게 살아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외선교’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아기셨을 때 헤롯의 칼을 피하여 예수님이 부모님이 잠깐 애굽에 피신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첫 해외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에 복음을 전하시는 중에 외국에 나간 것은 이 두로와 시돈지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오늘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두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한국의 부산과 인천 같은 곳이지요. 두로와 시돈은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었습니다. 다윗왕 때부터 ‘두로왕 히람’과 무역하였습니다. 다윗왕이 가까이한 친구였고(왕상5:1) 다윗성을 세울 때 두로왕 히람은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어 도왔습니다(삼하5:1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려 할 때 솔로몬이 원하는 대로 백향목과 잣나무 재목을 주었고 솔로몬은 밀과 기름을 주어 무역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두로나 시돈은 가장 문명이 발달하였고 자원이 풍부하여 의존하였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발달된 부요한 도시에 가셨을 때 가나안 여인 한 사람이 귀신 들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성경이 주시는 메시지가 너무 강력합니다. 선교를 위하여 땅 끝까지 간다 해도 결국 문제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딸이 귀신이 들려 젊은이의 소망과 비전에 가득한 삶을 살지 못하고 절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라사 지경에 가신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찾았습니다(막5장). 귀신의 영향에 있는 자는 첫째, 소망 없는 절망의 무덤에서 거합니다. 요즈음 한국의 젊은이들이 3포시대, 5포시대, 7포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절망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무도 제어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말도 그 누구의 말도 거역하는 세대입니다. 셋째, 돌로 자신을 자해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대학생들이 술로, 마약으로 섹스로 자신들의 몸을 자해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 악령에 의하여 파괴되고 있는 이 세대를 분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날씨, 즉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마16:1-4). 가나안 여인은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She was a Greek, born in Syrian Phoenicia). 그런데 이 엄마 한사람이 가정에서 깨어 있었습니다. 이 딸의 아버지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사망권세 아래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살길’(a new living way)이 열렸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깨어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한사람’의 선교지는 자신이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멀리 아프리카도 남미에도 땅끝까지 복음전파를 위하여 가야하지만 우리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선교지는 나의 가정이요 나의 교회요 나의 지역사회임을 성경은 깨우쳐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선교 많이 한다고 자랑하였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가 자신들의 자녀들은 세상의 악한 영들에게 다 먹혀 버리도록 직무유기하였습니다. 그런 선교의 패러다임을 무분별하게 받아드린 한국교회들도 엄청난 선교사들을 미국 다음으로 파송하였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동전의 뒷면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10명중에 9명이 대학에 가는 순간 교회를 떠납니다. 하나님을 떠납니다. 내가 오늘 ‘가나안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엄마는 지성이 있었습니다. 즉,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잘못되었음을 분별하였습니다. 이 엄마는 감성이 있었습니다. 이 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감추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문제를 자꾸 감춥니다. 체면 때문입니다. 자식 자랑은 돈 내고 하면서 문제는 꼭꼭 숨겨놓고 괜찮은 척, 잘되고 있는 척, 척병이 우리들의 자녀들을 병들게 하여 왔습니다. 문제 자녀는 없습니다. 문제 부모가 있을 따름입니다.

가나안 여인, 그 엄마의 심정이 되어 봅니다. 나는 좋은 것도 다 먹어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곳들도 다녀보았습니다. 그런데 장래가 창창한 나의어린 딸은 자신의 무덤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딸 이대로는 안됩니다. 내 딸이 고침 받아야 합니다. 내 딸에게 소망과 비전과 꿈이 있는 인생을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내 딸, 앞으로 잘 될 수 있습니다. 이 감성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 엄마는 지성과 감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지성은 지적인 것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감성이란 감정적인 것에 살아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영성이란 영이신 하나님께 반응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이 가나안 여인 엄마는 지성과 감성과 영성이 다 있었습니다. 무지할 줄 알았던 이 이방여인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15:21) 예수님이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메시아요 그리스도요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오실 구세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선교지는 바로 가정이라는 것, 자녀라는 것을 분별하고,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 나의 문제를 가지고 나는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 그리스도, 구세주요 나의 대제사장이시오 나의 왕이신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만이 나를 고치시고 내 딸을 고치시고 나의 자녀들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아주 차갑게 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마15:23). 두 번째는 점층법으로 더 심하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즉 유대인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은 적이 없다’(마15:24)고 쌀쌀하게 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마15:26)고 이 이방 여인을 개 취급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다 떨어져 나가게 돼있습니다. 누가 나를 개 취급을 하는데 붙어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는 ‘옳소이다 주님,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는 먹습니다. 큰 은혜도 자비도 아닙니다. 엄마인 내가 무시당하고 개 취급을 당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 딸은 고쳐 주세요.’ 끝까지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 엄마의 간절함에 예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듯이(창22:1),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셨듯이(요6:6), 이 여인도 주님이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쓰임 받는 사람은 ‘시험을 통과한 자들’입니다. 어떤 핍박과 아픔이 있어도 끝까지 한 영혼을 구령하기 위하여 자신은 오늘도 개취급 받습니다. 오늘도 핍박 받습니다. 선교사님들입니다. 문제는 해외에 나가서는 다른 문화와 다른 언어권에서 다 당하고 참고 끝까지 매달리는데 왜 나의 가정에 주신 나의 자녀와 우리교회에 주신 우리들의 다음세대를 위하여서는 참지도 못하고 기다리지도 못하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포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응받받을 때까지 주님께 달라붙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히 여기는(시42:1), ‘가난한 심령’(마5:3)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까지 가보아도, 오늘 우리의 삶에 땅끝까지 선교지에 가보아도 문제는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가정의 자녀’들인 다음 세대에 있습니다. 이 세대를 위하여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고 와서 나의 가정에 나의 자식은 마귀에게 뺏기는 비극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의 가정, 나의 교회, 나의 지역사회, 즉 가까운 곳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하고 직무유기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꿀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자녀들이 다니는 대학교가 이 시대의 ‘미전도 종족’입니다. 자녀들을 살리는 ‘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office.antioc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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