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일 목사 (시애틀평강장로교회)
“탕자의 비유”는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두 명의 탕자가 나온다는 것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둘째 아들, 아버지, 그리고 큰 아들이 나옵니다.
1. 둘째 아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자기 몫을 요구하였습니다. 11절에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온 분깃을 내게 주소서” 주님께서 지금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사람들은 이 둘째 아들의 행동에 놀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살아계신 아버지께 재산을 요구하는 행위는 분명히 배은망덕한 행위이고 후레자식들이 할 법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말은 “아버지, 어서 돌아가세요.” ”아버지, 이제 아버지가 지긋지긋합니다.” “더 이상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그들을 놀라게 한 사실은 아비가 그 살림을 주었다 라고 합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유대 근동지방에서는 아버지의 어떤 지위나 그의 업을 헐어버리는 일과 같은 ‘모욕적인 일’ 입니다만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재산을 줍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가서…다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니(13)’ 돈이 떨어지고, 친구가 떨어지고 ,상황도 나빠졌습니다. 다 없어진 후 ‘그 나라 백성중 하나가 저를 돼지를 치게 하였더니(15)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으나 주는 자가 없었더라(16).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둘째아들이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라도 먹으려는 유혹도 받았으나 그것도 주지 않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고 계십니까?
15:12절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비유입니다 이 둘째아들의 상황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럼 당연한 일이지.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해’ 서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 젊은이를 정죄합니다.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살기위해 돼지를 치는 것도 싸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17절 “이에 스르로 돌이켜” eis eauto eldon Came to himself(rsv)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 he came to his senses(niv) 이 뜻은 ‘자기 자신에게로 왔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제 정신이 아니었으나, 이젠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서 내가 누구였는데, 내가 왜 이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가? 내가 왜 쥐염열매를 먹을 때까지 바닥을 치고 있었는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성도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내 자신을 찾는 것이 복인 줄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만큼 “난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스스로 돌이켜”라는 eis eauto eldon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이 젊은이가 생각을 시작한 것은 다른 소음들을 막아버리고 아버지와 집 생각만 했을 때 가능해졌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쓸데없는 소문을 듣기 위해서 그렇게 문을 활짝 열고 분주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 아들이 생각을 하고 난 뒤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을 연습하며 돌아갑니다. “지금부터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어떤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생각이 아닙니다. 회개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회개는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울면서 돌아가는 자가 회개하는 자입니다.
2.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본 아버지는 뛰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냥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간 그 순간부터 아들의 삶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눈을 깜박이는 매 순간 우리와 동행을 하시며,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돼지와 같은 삶에 불과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시느라 아버지는 아들의 패역함을 허락하신 것이고, 아들의 이방 나라 행을 허락하신 것이며, 아들이 돼지우리 속의 쥐엄 열매를 다투는 자로 바닥을 칠 때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32절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쾌락과 행복만을 위해 살았던 둘째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그 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산자라고 선언을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처럼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희는 이미 벌을 받아 죽었다’고 선언을 해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살려 내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지신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는 자식이 동네에 들어서자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아시고 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연습한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서둘러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을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할 것 없어…더 이상 나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어…빨리 덮어주어라…”
3. 맏아들 실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절정이 바로 2532절입니다.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둘째 아들은 타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타국은 죄를 의미한다면, 밭은 일을 의미합니다. 돌아오니까 너무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춤추는 소리가 들려 한 종을 불러 물어보니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합니다. 큰 아들이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자기처럼 성실한 사람에게도 한 번도 베풀어주지 않은 잔치를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자에게 먼저 베풀어 주냐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그럽니다. 여기에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노예와 같이 섬겼거니와’라고 말한 것은 아들로 섬긴 것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고 자기 동생에 대해서는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이 아들… 이름으로도 이야기하지 않고 내 동생이라고도 하지 않고 경멸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에 그토록 성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좇아 열심히 살았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기쁘신데 큰 아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만 나옵니다. 왜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지요. 둘째아들은 죄의 노예, 첫째는 의의 노예였습니다. 둘째아들은 욕망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고, 충성한 아들은 그의 의 때문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죄가 아버지에게 아픈 것이 아니라, 그의 “의”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사람인가? 맏아들입니다.
의인들, 선하게 사는 사람들 하나님과 바르게 살려고 한 사람들이고 죄인들 세리들은 누구인가? 둘째아들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들, 하고 싶은 대로 한 사람들입니다. 둘 다 아버지보다는 자기중심으로 산 자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하나는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고, 순종하는 사람 2) 다른 하나는 내가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시는 사람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나를 꼭 축복해 주셔야 됩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성을 냅니다. 왜요? 아버지가 자기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누가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째 아들같이 집을 나갔다가 깨닫고 돌아온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을까요? 아니면 순종하기는 하는데, 늘 화가 나 있고, 남이 좀 못하는 것에 짜증내고, 무시하고, 난 저 사람보다 더 착한데, 왜 난 이렇게 저 사람은 저런가? 라는 불만이 가득한 맏아들이 많을까요? 내가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의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를 버리세요. 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헌신할 수 없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세상에 두 부류. 죄인으로 생각하는 죄인과 의인으로 생각하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집에서 한 번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던 자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은 모두 탕자입니다.
결론입니다. 이 비유는 미완성으로 끝내면서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오늘 우리들에게 묻고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자기희생의 사랑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Prodigal son 웹스터 사전에 극도로 ‘낭비하는’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낭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만 쏟아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쏟아 버렸습니다. 무엇을요? 사랑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21세기에 C.S. 루이스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내용을 Prodigal God이라고 그랬습니다. 사랑하면서 낭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호수에 비유한다면 그 호수 중에서 가장 맑은 호수, 밑에까지 볼 수 있는, 바닥이 훤히 보이는 호수가 눅15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은 죄로 더럽혀진 옷을 벗기시고 새 옷을 주시며 부정한 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마치 스가랴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처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3:4, 5)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구원의 옷”(사61:10)으로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입히실 때, 우리는 마치 양우리에 누운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이(시68:13)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silveronepak@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