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결단

(창세기 13장 1-3절)

조성근 목사 (갈멜산 금식기도원(안양·강화·LA)담임)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기독교의 위기를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그렇습니다. 지난 일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만큼 그 어느 것과 다른 야무진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정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이나 태도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결정한 것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행동이 어느 때보다 요구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결단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배웁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현재의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동쪽 300Km 떨어진 곳인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 땅에 머무르게 됩니다. 하란은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상업, 문화, 종교 중심인 오래된 도시인데 그 곳에 거류하던 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 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고 축복의 땅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가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우리도 떠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떠나야 할 땅은 보장받을 수 없는 하나님이 없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는 땅입니다. 죄를 떠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엉뚱한 곳에 머물면서 막연히 먼 산만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복은 우리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복된 삶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떠나기 쉽지 않은 환경도 무릅써야만 합니다.

1)말씀 따라 떠나야 합니다(창12:4). 사람들의 말이나 주변 형편이나 분위기에 따르지 않고 오직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머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까 떠나는 것입니다. 머물고 싶은 화려하고 편한 환경에서 떠나야 하는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정든 이웃과 사랑하는 친족들과 헤어져 말씀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회개는 사람과 상의 할 일이 아니고 말씀에 순종할 일입니다.

2)모르지만 떠나야 합니다(히11:8).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할 지라도 분명하게 떠나라고 하시니 떠난 것입니다. 확실한 내일이 없이는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아브라함은 떠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습니다. 내일은 몰라도 오늘 주어진 하늘의 결정을 따른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우리는 내일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떠나라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등이 되고 빛이 되어 인도하십니다.

3)이제라도 떠나야 합니다(창12:4). 결단에는 늦은 나이가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오늘이 가장 늦은 날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바라보면 오늘은 가장 빠른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늦었다고 핑계 대는 이들에게 이제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는 아닙니다. 불확실한 내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기를 결단해야 합니다(롬13:14).

2. 어려워도 머물러 있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결단하여 하란 땅을 떠나 기대 속에 머물던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들게 되었습니다(창12:10). 확신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의심될 만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떠날 수 없는 곳을 떠났던 대단한 결단도 갈등할 만한 문제를 겪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맞서서 해결하든지 도망하든지 합니다. 아브라함은 문제에서 도망가기로 했습니다. 당면한 문제에 도움 될 듯 한 풍요롭고 물이 많은 애굽 땅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살아보겠다고 애굽 땅에 간 그는 아내를 빼앗길 수도 있고, 자신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쌓입니다. 그래도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던 그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애굽 땅에 머무르려 합니다. 이제 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으로 알려집니다(창12:13). 말씀을 떠나려고 하는 이들은 무슨 명분이라도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또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무슨 거짓말이라도 주저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바로가 사래를 자기의 아내로 삼으려는 일에 아브라함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많은 예물을 받으며 아내를 바로의 아내로 내주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기근이 있는 가나안땅에 머무르는 것이 지금 상황보다는 더 나을 듯합니다.

1)자신을 위한 일입니다(창12:18,19).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말과 달라 헛되지 않습니다. 혹 고난이 있다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이 일로 인해 귀감이 될 만한 하란을 떠났던 결단이 우스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에게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어려워도 신앙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2)가정을 위한 일입니다(창12:15). 아브라함은 하란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애굽 땅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멋진 설득력이 있습니다. 심한 기근에 궁여지책이라고 해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가정은 풍비박산이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의도했던 바도 아니었으니 아브라함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패닉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가정을 위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가정을 책임져주실 하나님께 맡기고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두 정탐꾼을 살려준 기생 라합이 얻어낸 약조는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어떠한 경우에도 그 집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약속이 지켜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가정을 위한 행복한 약속입니다.

3)이웃을 위한 일입니다(창12:17). 바로는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생각지 못한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에 있어야 할 아브라함이 애굽 땅에 거주하면서 바로왕의 집안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마5:13). 우리의 착한 행실이 그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그들이 행복해지게 해야 합니다. 이웃사랑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지키는 것은 이웃사랑의 시작입니다. 죄를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온 결단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머물던 하나님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은 어떤 이유이든 어리석은 일로 자신과 가정과 이웃을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떠나는 결단과 함께 우리는 머물러 있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3. 돌아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창13:1). 부정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도 종살이 했던 애굽 땅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려고 했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때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장담이 위험하고(장18:12), 선줄로 아는 자기 착각이 넘어지게 합니다(고전10:12). 하지만 하나님이 긍휼을 따라 진솔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돌아서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따라 가족들과 짐승 떼를 몰고 애굽 땅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갑니다. 겉보기와 달랐던 애굽 땅은 그가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있을 곳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이었습니다.

1) 기회를 따라 결단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후회만 하다가 아직도 남아있는 기회마저 잃는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합니다. 진작 가나안 땅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힘들어도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은혜를 맛보고도 타락한 이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2:12).

2)모든 것이 다 돌아와야 합니다. 결단은 전 인격적이고 전 생활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난 세상에 남겨놓을 수 없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물질도 다 돌아와야 합니다. 몸만 성전에 들어오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안하는 것은 아니라도 하는 것도 아닌 것은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의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돌아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입니다.

3)결단은 예배가 회복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확실한 결단은 예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13:4).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들의 확실한 변화는 예배의 삶에 있습니다. 진지한 자세의 예배에 눈물 젖은 찬양이, 선포되는 말씀에는 깨달음과 감격이 있습니다.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노래하며 감사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모이기에 힘쓰고 어려운 생활에도 전적으로 헌신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드리고자 했던 그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좀 먼 길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벗어났습니다. “사무엘이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 만을 섬기라”(삼상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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