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 성자 해석 손정도 목사

은희곤 목사

평화드림포럼 대표

‘손원일 제독’을 아시나요?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을 지내시며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셨습니다. 그러면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도 아시나요? ‘걸레 성자’로 불리웠던 ‘해석 손정도 목사’입니다. 오늘 아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더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는 그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손정도 목사는 구한말 과거시험을 보러가다 전도를 받고 갓쓴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후 숭실학교를 거쳐 감리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선교사, 봉천 선교사, 하얼빈 선교사로 일하면서 신민회 조성환 선생을 통해 안창호 선생과 의형제를 맺습니다. 이후 가츠라 암살사건의 주모자로 고문을 당하고 진도 유배를 거쳐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동대문교회를 담임하며 종로서 사건의 김상옥 의사에게 그리고 정동교회를 담임하며 ‘3.1 만세운동사건’의 유관순 열사 등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3.1운동 때에는 이승훈 선생의 권유로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고종의 밀사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고사했고, 그뒤 상해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으로서 의정원장을 거쳐 상해 한인교회, 길림 신첩교회, 액목현교회를 담임자로 섬겼습니다. 당시 상해 임정을 떠나 길림으로 떠난 손정도 목사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 생애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은 ‘호조운동’이었습니다. ‘호조(互助)’란 말 그대로 ‘서로 돕는 자급자족의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주식회사 형태인 ‘농민호조사’를 설립했고 ‘만주 액목현’ 일대에 대규모 땅까지 매입하여 이상촌 건설에 열정을 쏟은 결과 100여채의 농민호조가 입주했지만, 일제의 방해공작과 만주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일제의 고문 후유증의 재발과 병마에 시달리다 1931년 당시 49세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망명지에서 눈을 감습니다. 일제는 그가 순국하자 ‘드디어 죽었다.’고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그의 유해는 만주 벌판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후대들은 그곳의 흙을 가져다 국립현충원에 ‘가묘’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남다른 목회적 사랑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안중근 선생이 옥고를 치루고 사형을 당하자 부인과 자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고 또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주변을 늘 항상 돌아보며 함께 했습니다. 이 가운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15세 소년 김성주를 만주 길림에서 3년간 돌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때 어린 소년 김성주는 후에 북한의 김일성이 되었기에 이것이 해방 후 그를 우리 역사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의 삶을 통해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앞서 말한 ‘김상옥 선생’과 ‘유관순 열사’외에 호형호제한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조소앙,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병옥 선생’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모두 그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랐습니다. 이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그의 ‘항일이력’과 ‘형제애’도 있었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그의 ‘신앙과 사상’이었고 이를 직접 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살겠다.’며 안락과 부귀를 누리는 비단의 삶을 거부하고 고난과 희생을 자처한 삶을 살았던 해석 손정도 목사! 그는 이렇게 자신을 가르켜 항상 ‘걸레’라 칭했습니다. ‘걸레’는 자신의 몸으로 항상 더러운 곳을 훔쳐 닦아냅니다. 그 일의 결과로 자신은 늘 더러워집니다. 

걸레처럼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 걸레가 되기 위해 자신을 늘 깨끗이 준비하는 사람, 걸레처럼 임무를 마치면 조용히 뒤로 물러서는 사람, 그는 그것을 한마디로 ‘걸레정신’이라 불렀고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중심인 ‘생명나눔’이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손정도 목사 그는 이렇게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인이 된 이후부터 평생을 대접받기 보다 대접하며 그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주변 이웃들을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걸레신앙‘으로 섬기고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19년 KBS 성탄특집 ’걸레성자 손정도‘가 방영된 후부터였습니다. 당시 ’걸레 성자 손정도‘를 제작 방연한 방송사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 빛이 다시 돌아오는 광복의 날을 확신할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 가장 낮고 그늘진 자리에서 오욕의 어두움을 닦고 또 닦았던 사람. 그리하여 독립이라는 희망을 별처럼 걸어 놓았던 사람 … 중략 …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선택한 해석 손정도 목사(1882-1931)의 삶을 통해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사랑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고 그를 소개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밝히고 있다. 

명예와 재물과 권력에 사로잡혀 해서는 안될 일들도 서슴없이 해치우고 대접 받기를 즐기며 비단길만을 걸으려고 하는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와 지도자들이 정말 배우고 따라 실천해야만 하는 ‘해석 손정도 목사의 걸레 신앙’은 바로 ‘예수제자의 삶’이셨습니다. 그는 평생을 걸레로 살았지만, 그는 결코 걸레가 아니라 예수의 피로 탐욕을 닦아냈고 예수의 삶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갔던 진정한 ‘예수제자’였습니다. ‘걸레 성자 해석 손정도 목사!’를 바라보며 오늘 내가, 교회가 다시 한번 ‘비단이 아니라 걸레’가 되기를 그리고 이를 몸으로 실천하기를 그래서 세상의 지탄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도하며 희망해 봅니다. 

pastor.eun@gmail.com

 

05.0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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