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녕 사모 (프린스톤한인교회)
물에 떠내려가는 동생 모세를 멀리서 따라가다 바로 공주에게 건지우니 히브리 유모로 엄마를 불러와 바로 공주의 보호아래 모세를 키우도록 어린나이에 순발력이 뛰어나고 담대한 누나 미리암이었습니다. 그렇게 지켜낸 동생이기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그 모진 고난을 이기고 이스라엘 대군을 이끌어내는 민족의 대 지도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의기양양 자기 의가 하늘을 찌르듯 콧대가 높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모세와 더불어 여인네들을 이끌고 소고를 쥐고 춤을 추니 내심 자신이 하나님된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먹을 것 잠잘 곳 힘들어지니 자연 높아지는 백성들의 원성을 견디어내느라 힘겨운 모세 곁에서 미리암은 어느 쪽에 서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모세에게 “너만 하나님과 친하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니 나나 우리나 뭐가 다르냐?” 저가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한 것이 메추라기 싫컨 얻어먹고 큰 재앙으로 많은 백성이 죽고 나서 얼마 후에 일이니 매일 백성들의 원망소리에 시달리는 모세 동생 편에 서서 안타깝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두뇌회전이 빠르고 순발력에 뛰어난 그녀라면 모세가 하는 일들이 일만 터지면 머리 처박고 엎드려있으니 일이 터질 때마다 조바심 나고 얼마나 답답해 뵈고 속이 터졌겠는가 싶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화난 백성들의 돌벼락 받을 것 같아 불안해죽겠는데 사고치는 모세입니다.
계명을 받은 대표자로 계명을 지켜야할 모세가 이방 여인 구스여인과 결혼을 하니 본이 못되는 리더에 대한 불타는 정의감으로 미리암은 불신임 투표를 야무지게 집니다. 분명 옳은 소리이긴 한데 그 비난의 동기가 문제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불평을 해대는 데는 올림픽 선수감들인 화난 백성들인데 건수를 불을 키고 찾아내어 모세를 공격해오는 형편에 다른 이도 아닌 누나가 칼을 던집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미리암의 눈에는 모세는 아무도 흔들지 못하도록 방어해주고 세워주어야 할 리더라기보다는 내가 건져내 생명을 빚진 어린 동생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점점 조여 오는 불안한 상황에서 “얘야 비켜라. 차라리 내가 나서마. 나도 너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쓰임 받는 분의 종이잖니?”라고 스스로 안수하여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뜁니다. 누나조차 대적하니 모세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위도 아래도 없이 불평이 올라오는 대로 떠들어대는 이스라엘의 혼란한 상황을 더욱 뒤죽박죽 만들고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며 민족의 위기로 몰고 가는 극한 상황입니다. 모세를 힘껏 세워도 모자라는 판에 구스여자와 결혼하면 안된다는 옳은 명분으로 지도자를 끌어내리니 어렵사리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가는 하나님의 소명이 풍전등화로 몰고 갑니다.
잘잘못을 따지고 지도자를 물고 늘어지면 제일 피해자는 누구일 것인가? 바로 자신입니다. 디딘 땅이 꺼지고 자기가 제일 먼저 죽게 되는 것을 알기나하는가?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험을 잡고 물고 늘어지자 치면 제대로 서 있을 능력의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옳고 분해도 모든 불평, 원망의 소리를 끄고 조용히 멈추어 서서 하나님나라를 세우고 있는지? 나의 옳은 소리가 하나님이 세운 리더를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나라를 허는 것은 아닌지 깊이 큰 그림으로 자신의 소위를 늘 살피는 것이 체질화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어줍잖은 나의 뜻을 관철하려는 모든 행보보다 하나님의 질서를 세움이 우선순위임을 깊이 생각하며 앞장 선 리더건 뒤에서 도우는 자리이건 허는지? 세우는지? 성령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분별의 인내가 사명자의 기본자세입니다.
모세의 누나라는 것 하나로 그럴 수 있었지만 그 자리를 떠나면 착각일 뿐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가다만 인생으로 끝나는 미리암입니다. 잘난 아내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세우는가 허는가? 인생은 선택입니다. 어느 자리에 두셨던지 정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몸을 세워가는 거룩하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넘치는 분수를 아는 조력자 생애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