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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중부 크메르(Central Khmer)

태국에 살고 있는 중부 크메르족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일어났던 전쟁으로 인해 태국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다. 캄보디아와 접한 태국 동부의 국경지대를 따라 있는 난민촌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언어는 크메르어, 캄보디아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동부 몬-크메르 언어이다.

대크메르제국은 9-13세기에 번성하였던 나라이며, 현재의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남부를 모두 지배하던 제국이었다. 크메르제국은 타이족과 베트남족이 크메르족을 정복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 영토가 현재 캄보디아로 알려진 지역에 한정됐다.

폭격, 내전, 베트남과의 전쟁 등이 1970년대의 캄보디아를 죽음의 땅(킬링필드, killing fields)으로 만들었다. 많은 크메르족 사람들이 평화로운 곳을 찾고자 하는 소망으로 태국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태국 역시 정권교제, 군부의 쿠데타, 폭동 등 나름대로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베트남전이 끝난 직후, 수천 명이 태국으로 피난했고 이는 태국 경제에 부담이 됐다.

삶의 모습

1975년 있었던 크메르 루즈 정권은 캄보디아를 거의 파괴했다. 도시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3백만 명이 시골에 가서 노예로 노동을 강요당했다. 굶주림이 만연해, 농촌사회개혁 이상실현이라는 이름하에 백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북쪽 태국으로 피난하기도 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라오스로 여정을 떠났으나 그들이 갈구했던 피난처를 찾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은 옷, 집, 의약품, 음식 등의 부족을 겪어야만 했다.

태국에 정착한 크메르인들은 작은 촌락을 형성하거나 난민캠프에서 생활했다. 거기에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소유 재산은 전무했다. 이들의 피난처는 짚으로 지붕을 덮고 막대 위에 대나무 벽으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1975-1979년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사망해 크메르족은 남녀성비가 맞지 않는다. 오늘날 과부와 고아들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으며 여성들은 한때는 남성의 몫이었던 책임들을 수행해야만 한다. 여성들은 색채가 다양한 치마를 입으며, 적색과 백색 체크무늬의 천이 머리에 두르는 것에서 아기들을 감싸는 것까지 다양하게 사용된다.

모든 크메르족 사람들은 마을의 일에 동참하며 물을 댄 땅에 쌀농사를 짓는다. 각 마을마다 수장이 있으며, 마을들을 통합하는 정치적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의 수장은 마을 사람들과 중앙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마을의 리더십은 나뉘어진다. 수장은 세속적인 부문의 일에 대해 권위를 가지며 불교 승려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 불교의 행동규범들이 사회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크메르족은 이웃인 타이족의 언어와 문화를 익혀왔다. 역사적으로 크메르족 역시 타이족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 두 종족은 공통된 유대의 끈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 크메르족 음악은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반영한다. 또한 전통춤과 고전궁중발레가 유명하다.

신앙

이전의 크메르왕국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와 불교를 전해 받았다. 오늘날 크메르족의 94%가 불교도이다. 그러나 조상숭배와 영혼숭배 같은 전통 민족종교의 유산은 여전히 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불교의 영향으로 크메르족은 열반(涅槃)으로 가는 중도를 구하고 현세에서 공적을 쌓음으로 궁극적 평화를 추구한다. 공적은 불교사원의 건립을 지원하거나 불교 승려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불교수도원에서 공부하는 것 등을 통해 쌓을 수 있다. 시골의 소년들은 종종 불교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기 위해 중이 된다.

필요로 하는 것들

중부 크메르족은 평화를 찾아 자신들의 본래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이 열망했던 평화는 태국에서도 주어지지 않았다. 중부 크메르족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에게 소개해줄 사랑의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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