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정체성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구원 받은 성도는 잘 믿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교제하는 어느 장로님은 열심 있는 신앙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 이유인즉 열심 있다는 사람은 대부분 교회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존재감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그는 강변한다.

그렇다면 열심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열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적으로 많은 시간과 헌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적으로 보상심리가 클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성도는 구원 받은 존재이나 그 속에는 여전히 부패한 질료가 남아있다고 칼뱅은 갈파한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되면 열심에 대한 보상 심리가 일어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열심 있는 사람 중에 자칫 잘못하면 교회의 문제 메이커가 되기 쉽다. 아마도 서울의 문제가 많은 대형 교회의 치열한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사람들마다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열심을 냈던 분들일 것이다.

기사화 되는 대형교회의 투쟁은 결코 끝 간 데를 모를 정도다. 수년 동안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결사적으로 투쟁을 지속하는 곳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투쟁을 지속할 때 영적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앞장서고 있는 당사자들일 것이다. 투쟁이 진리 문제, 또는 진리가 핍박당하는 경우라면 투쟁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이권이나 명예 문제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까 싶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은 개운치 않을 수 있겠으나 우리는 머잖아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사람들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준비해야 하는 신앙인들이다. 옳고 그름을 지나차게 현세에서 밝히지 않는다 해도 주님 앞에서 완벽하게 밝혀지게 된다. 그 마지막 순간이 우리에게 오고 있으니 좀 인내하고 견디어야 하지 않을 까?

우리는 뭔가 조급하게 결과를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태리에서는 종류가 수없이 많은 소위 긁는 복권이 인기가 높다. 당장 몇 십초 안에 현장에서 당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그럴 수 없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모든 인생은 그 앞에 반드시 서야하고 그 곳을 비켜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설령 원통한 일을 당한다 해도 그리 탄식할 일은 아니지 싶다. 원통한 일이란 무엇일까? 대체로 속임을 당하고 건물이나 돈을 강탈당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강탈당한 다해서 그 사람이 가져가는 것도 아니다. 건물이나 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세상의 정복자들이 일시적으로 빼앗을 수 있었지만 자기화하지는 못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자리에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기원전 67년 당시 로마공화정의 일년 세입에 버금가는 재산을 소유했고 2008년 포브스가 역사상 가장 부요했던 75인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된 크라수스(Marcus Licius Crassus, BC115-53)가 있다. 당시 수도 로마의 땅 대부분이 그의 소유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로마를 다닐 수 없을 정도였고 시이저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빌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땅은 수많은 소유주만 바뀌었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빼앗겼다는 것은 실상이 아니다. 다만 일시적으로 관리권을 넘겨주었을 뿐이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 치열하게 원통해하고 애걸복결할 일도 아니지 싶다. 우리는 그저 관리하다가 그대로 돌려드리고 가야할 숙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주신 영원한 복음이요, 생명이요, 상급의 조건들이다. 그것들을 생명 있을 때 많이 쌓아놓아야 한다. 그것은 외적 조건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 사실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된다. 크다고, 부유하다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했지만 주님께로부터 다른 어떤 교회보다 더욱 매몰찬 책망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항상 본질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언젠가 내가 관리하는 모든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사실과 주님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 까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에 올인하고 있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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