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한인교회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감미로운 단어는 사랑이라는 명사일 것이다. 사랑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남녀 간에 일어나는 애틋한 마음이다. 이 시대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타산적으로 반응하지 옛날처럼 사랑하나만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삶이 힘들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감미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한다. 짧지만 강력하고 이성을 눈멀게 만드는 마약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일설에 의하면 성프란시스와 클라라는 연모하는 관계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대에 만났고 성프란시스에 끌려 수녀가 되었고 사역지도 같은 앗시시였으니 말이다. 병약했던 프랜시스는 늘 돌봄을 필요로 했는데 그런 사실을 아는 클라라는 자신이 운영하는 수녀원에 와서 요양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강론을 위한 목적 외에는 결코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속내를 알 수 없으나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여겨진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사랑을 추구한 중세의 탁월한 수도사가 있었다. 그는 불란서의 아벨라르(Abelard1079-1142)와 엘로이즈(Heloise 1100-1163)이다.
아벨라르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그는 당시 어떤 사람과 논쟁해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수사학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이는 최고의 석학이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 구라파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는데 어느 때는 5천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스콜라철학의 아버지로 근세철학, 논리학, 언어학, 신학에 그의 이름이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사람이다.
역사가 호이징가는 그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창조적인 자로 12세기가 낳은 대 학자라고 칭했다. 1117년에는 교황과 추기경 19명, 50명 이상의 주교와 대 주교가 한꺼번에 그의 강의를 들었다. 30대 중반에 학문적으로 최고의 자리인 노트르담 성당학교의 강사가 되어 15년 동안이나 강의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앞에 한 사람의 재기 발랄한 소녀가 나타났는데 그녀의 이름이 엘로이즈다. 명석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성당의 참사인 삼촌이 최고의 학자인 아벨라르에게 조카 엘로이즈의 가정교사를 부탁했다. 당시 아벨라르는 39살이었고, 엘로이즈는 16살이었다. 당시 엘로이즈는 앞날이 촉망되는 대단한 재기를 보이는 소녀였다. 아마도 그런 조카를 최고의 석학인 아벨라르가 지도한다면 놀라운 학문의 업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남녀의 관계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순수한 지식에 대한 열정에서 차츰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엘로이즈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 아벨라르를 향한 존경심이 사랑으로 변하고 있었다. 수사 아벨라르 역시 엘로이즈의 번쩍이는 천재성과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같이 깊은 눈에 풍덩 빠져버리고 싶은 격정이 노도와 같이 마음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코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으며 학문하는 순간이 어느 사이 최고의 행복한 순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드디어 저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사랑하는 일로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훗날 아벨라르의 고백록에서, 책은 펼쳐져있지만 철학공부보다 사랑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수없이 오갔으며 학문에 관한 것보다 입맞춤이 더 많았네. 손은 계속 그녀의 가슴을 오르내렸고.... 1년 동안의 치열한 사랑은 아이를 임신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당시 덕망 높은 수사의 이런 행동은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신학자는 철저하게 독신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이벨라르의 찬란할 앞날을 위해 엘로이즈는 무섭게 반대하였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 분노한 사람은 바로 삼촌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라고 흥분한 삼촌은 종을 시켜 자고 있는 아벨라르의 성기를 자르게 했다. 레위기에서는 남자의 성기에 문제가 있으면 제사장은 물론이고 성막 봉사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아벨라르의 정신적 고통은 대단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고 각각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엘로이즈는 한 남자에게 품었던 사랑을 하나님께 돌리고 이제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편지 왕래는 지속했다.
아벨라르는 맨손으로 파라클레 수도원을 일구었고 엘로이즈 역시 수도원을 운영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운영하는 수도원이 폐쇄하게 되자 아벨라르는 자신의 수도원을 그녀에게 넘겨주고 수도원을 위해 모금까지도 했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온 구라파 청소년들의 사랑의 노랫말이 되었다. 우리의 춘향전처럼....
아벨라르는 죽기 얼마 전에 이단의 판정을 받았고 그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당시 가장 뛰어난 영성가 시토 수도원장 클레르보 베르나르도였다. 그러나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이런 일연의 일들을 보면서 엘로이즈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벨라르가 63세에 세상을 떠나자, 뜨겁게 사랑했던 엘로이즈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무덤을 쓰도록 했다. 엘로이즈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 후 엘로이즈도 63세에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을 합장했다.
죽어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나누도록 말이다.
그녀는 이런 시를 남겼다. “나는 가혹한 운명을 당신과 함께 모두 견디어 냈습니다. 청하오니 이제 당신과 함께 잠들게 하소서. 빛이 있는 쪽을 향하게 하시며 영혼을 자유롭게 하여 주소서.”
1792년 파라클레 수도원이 해체되어 1817년 두 사람을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어주었다. 그토록 가슴절절하게 사랑했던 두 사람은 비로소 안식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겨우 1년 동안이었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요, 이 시대 사람들이 본받아도 좋을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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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