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1)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하버드대 철학교수 화이트 헤드(White Head)는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Augustin354-430)의 주석이라고 했습니다. 윌리암 호로다인(William Hordein)은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천년에 한번 씩 나온다면 세상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칼뱅의 주권신학이나 말틴 루터의 칭의신학이 태동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천재나 영웅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운 끼치게 됩니다.

그런데 영웅이나 천재가 단명하지 않을 때 인류는 그를 통해 더 많은 유익을 입습니다. 대단한 천재라도 너무 단명하면 그 귀한 재능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음악가나 화가들 중에 예외도 있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어거스틴은 77세까지 장수하면서 177권의 책을 썼고,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칭의와 은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사양철학사의 시조로 존중을 받는데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많으나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굳이 꼽는다면, 플라톤, 어거스틴, 칸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 어거스틴에 대하여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의 알제리의 다카스테에서 출생했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 흩어져 살고 있는 베르베르족으로 얼굴이 약간 가무잡잡한 사람들입니다(불란서의 축구선수 지네단 지단이 베르베르인임). 그런 이방인이 가톨릭의 4대 박사 중 한분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누구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지극히 탁월한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고향에서 공부하고 한니발의 활동무대이었던 칼타고로 유학을 갔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함을 본 후원자가 나타나게 되어  학업을 마칠 수 있었고, 그 후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시 경연 대회에서 입상하여 월계관을 총독으로부터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에 칼타고에 횡행하는 마니교에 입교할 정도로 영혼에 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16살 때부터 한 소녀와 동거생활을 하였고 18살에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음으로 어머니를 근심하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니카에게 큰 고통과 더불어 아들을 향한 눈물어린 기도의 제목이 되게 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신앙과 변화를 위해 치열하게 기도로 매달리게 만든 동인이었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은 회고록에서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기록하기를, “어머니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교회를 갔고, 매일 예물을 드렸고 말씀을 듣고 헌신하는 일에 자신의 몸을 드렸다.”

그런데 아내와 자식이 있는 어거스틴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당시 칼타고의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엉망이었습니다. 전혀 진지함이 없었고 학문에 대한 열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주변의 권고도 있었고, 당시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로망이었던 로마로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야 하는 일이었고, 어머니는 결사적으로 그 일을 반대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딜레마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때는 29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거스틴을 설득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아니면 로마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정욕적으로 살고 있는 아들이 어머니를 떠나 산다면 더욱 방탕한 길을 걷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럴듯하게 어머니를 속였습니다. 칼타고 바닷가에는 키프리아누스(Cyprianus, 교회 일치의 선봉으로 AD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순교함)의 기념 교회당의 잔해가 지금도 쓸쓸하게 남아있습니다. 강대상의 터는 지중해를 향해 있었고, 로마로 가는 배는 가까운 항구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함께 그 교회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기도하는 사이 어거스틴은 몰래 빠져나와 배를 탔고 배는 천천히 로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너진 키프아누스 교회 터 담벼락에는 동판으로 이 일을 표기해 놓았습니다. “383년, 어거스틴을 떠나보내며 모니카가 눈물 흘렸던 곳.”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 아들이 없어 황급히 나가보니 로마를 향하는 배는 이미 천천히 출항하고 있었을 때 그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모니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인물을 배출했던 칼타고가 1600년이 흐른 지금 모슬렘으로 덧칠해졌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유럽으로 가고자 하는 난민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떠났던 바로 그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지중해의 파아란 물결이 역사의 수많은 사건들을 가슴에 품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사건조차 잊지 않고 말입니다. 그리고 드넓은 지중해는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어떤 역사를 이루어 가느냐?”고 말입니다.  

chiesadiroma@daum.net

 

09.1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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