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의 황제들: 데키우스 황제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교회 주변의 길 이름은 로마의 영웅 및, 장군들의 이름들로 명명했다. 예로 우리 교회 앞길은 160년경의 유명한 집정관 출신의 귀족가문의 이름이다. 산책을 하던 중 Via Decio라는 길을 보고 사전으로 찾아보니 기독교를 극렬하게 핍박한 황제의 이름이었다. 흥미가 일어나 데키오 황제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로마는 다신교를 섬기는 국가이기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에 대체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 종교와는 다르게 절대 타협을 하지 않았기에 통치자들은 항상 걸림돌로 여겨왔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재난이 올 때나 국경수비가 위태로울 때, 그 원인을 기독교 탓으로 돌리곤 했다. 국민이 하나가 될 때 국력은 강성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어수선한 때에 황제에 오른 사람이 데키우스(Decius Valerianus 249-251)다. 데키우스는 아랍 출신의 필립 황제를 베로나 근처의 전투에서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앉게 되자 로마제국을 과거의 강력한 국가로 회복시켜보려는 야심을 가졌다.

그는 250년 1월에 작심하고 눈에 가시 같은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법령을 선포했다. 즉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은 국가적으로 섬기는 신만을 경배하고 행정관이 보는 앞에서 그 신에게 신성한 제물을 드려야한다고 말이다. 이 포고령은 기독교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이처럼 황제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말살하려는 정책은 처음 실시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이 정책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단번에 배교하게 만들었다.

칼타고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로마의 신을 섬기는 제단으로 나갔고 심문을 받기도 전에 신앙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교도 신전에 제물을 바치기 위해 늘어선 기독교인들로 넘쳐나서 관리는 다음에 오라고 돌려보내야 할 정도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기독교들이 감독의 인도로 집단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일에 합류하는 일도 있었다.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고 서머나의 감독 육테몬(Euctemon)이 배교하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 많은 성도들이 배교하는 현상을 보며 당시의 영적 지도자 키프리아누스는 이런 말을 했다.

“오랜 기간 동안의 평화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기강을 타락시켰다. 개인들은 부를 누리는 데만 관심을 기우리다가 사도 시대 성도들의 행위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고 자신들의 신앙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자선의 행위도 없었고 신앙의 훈련도 없었다. 남자들은 흉측하게 수염을 길렀고 여자들은 표피적 아름다움을 위해 많은 거짓으로 꾸몄다. 눈 모양도 바꾸었고 머리색도 가짜로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와 모범이 되어야 할 감독들이 그들의 경건한 사역을 멸시하고 세속적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직분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양 무리들을 떠나 해외에 여행하면서 돈을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시대의 현상과 비슷하지 않을 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역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로마의 감독 화비안(Fabian)과 예루살렘의 감독 디오니누스(Dioninus)가 처형당했고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겨우 피신했고 오리게네스(Origenes)는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제물로 드린 자들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를 철저히 말살시키려고 시도했던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전쟁 중에 251년 6월에 전사하자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혹독했던 박해를 끝나게 만들었다. 박해를 피해 카타콤 베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은 환호했을 것이나 배교했던 무리들은 낯을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신앙의 배교자들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변명하고 처세술에 능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항상 그런 모습을 보여 왔다.

우리도 신사참배를 경험했다.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옥중에 갇혔던 사람들이 출옥하고 신사 참배한 일을 철저히 회개하자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항하고 거절했다. ‘당신들만 고생한 줄 아느냐? 우리도 남아서 교회를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말이다. 우리는 신사 참배에 동원되어 머리를 숙였으나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주님께 기도했다고 항변했다. 우리들의 신앙 내용은 주님 앞에 가서야 명확하게 들어나게 될 것이다.

폐일언하고 성도는 은혜로 받은 구원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한 최소한의 영적 응답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chiesadirom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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