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운동 경기는 반드시 한쪽은 이기고 다른 쪽은 진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면 이긴 자는 펄쩍 펄쩍 뛰며 환호하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기뻐한다. 그러나 진 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때로는 뜨거운 눈물을 뿌리기도 한다. 그런 장면을 보면 왠지 모르게 이긴 자에게 승리에 박수를 보내기보다 패자에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난다. 어쩌면 인생은 승리의 순간보다 실패의 기회가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로 승자는 패자에게 다가가 꼭 껴안고 위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 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약관 24살로 패기만만한 나이였고, 이제껏 어머니의 섭정으로 인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또한 황제의 잃어버린 영토도 회복하고 싶었고.... 교황 또한 대단히 외골수적인 성품의 강인한 개혁자였다. 그는 클리니 수도원의 일원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서서 일했던 수도사였다. 세속적 간섭을 물리친 독립적인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즉 지역 영주와 결탁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수도사에 대해 철저하게 개혁하려고 했다. 이런 청빈한 수도회의 리더 힐데브란트의 리더십은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후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알렉산더 2세에 의해 그레고리 7세로 교황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 교황이 세상적인 황제나 제후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했다. 또한 개혁의 의지를 굳게 다짐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황제의 주교 서임권이었다. 당시 각국의 주교 서임권은 해당국가의 왕들이 지니고 있었다. 고로 주교들은 교황의 말보다 왕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이런 행동이 곧 교회를 타락하게 만든다고 여겨 왕에게서 이 서임권을 찾으려고 했다. 이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제후들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영지가 있었으나 황제에게는 봉토가 없었다. 그래서 제후들은 황제의 얘기를 잘 듣지 않았고, 황제의 힘이 강해질 것 같으면 죽이거나 갈아치우곤 했다. 고로 황제에게 주교 서임권은 돈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기에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황제는 그레고리 7세의 개혁안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부추겨 교황을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교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를 파문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왕권 강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제후들은 이 찬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또한 강력한 교황을 두려워하여 황제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1076년 10월에 모여 왕의 모든 상징물을 버릴 것과 교황과의 화해를 받을 때만 황제직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교황은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을 아우스부르크에 소집하여 향후 황제의 운명을 결정하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 4세는 선택의 여지없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1077년 1월, 교황은 아우스브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그런데 며칠 후 황제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순간 당황한 교황은 카노사 성의 성주였던 마틸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줄 알고 두려워했던 교황은 황제가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077년 1월 25일 카놋사에 도착한 황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아내와 3살짜리 콘라드를 동행시켰다. 파문을 내린 교황의 동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그 추운 날 허름한 옷을 입고 맨발로 카놋사의 성문에서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교황이 머무는 방문은 전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이라도 빌고 또 빌더라도 교황의 선처를 반드시 받아내야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였다. 26세의 패기 넘치는 황제와 산전수전을 다 겪은 50세 교황의 수 싸움은 치열하기만 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교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을 극적으로 화해시킨 것은 성주 마틸다와 클리니 수도원장 후고였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베드로라면 어떻게 했을 까? 용서를 구하는 자를 거절할 수 있었을 까? 베드로의 후계자가 추운 겨울날 성 밖에서 용서를 구하는 자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교황은 1077년 1월 28일, 삼일 만에 문은 열리게 되었다. 결국 교황은 자신의 미사에 황제를 참석케 함으로 파문을 거두어 들였다.
황제가 돌아가기 전 만찬을 베풀었으나 하인리히 4세는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아마도 마음에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꾹꾹 참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상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데 그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로 돌아간 황제를 제후들은 받아들였고 황제는 힘을 길렀다.
그러던 중에 작센지방의 영주들이 대립 왕을 세웠다. 분노한 황제는 작센지방으로 쳐들어갔고 그들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이내 황제를 파문하자 황제는 곧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에 쳐들어왔다. 로마를 점령한 왕은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를 산타 안젤로 성에 구금했다. 그리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를 후임 교황으로 추대했는데 그가 바로 클레멘스 3세다. 클레멘스 3세는 감격하여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머리에 번쩍이는 관을 친히 씌워주었다. 산타안젤로 성에 구금된 폐위된 교황은 자신을 구하러 온 노르만 사람 로베스 가스카르를 따라 나폴리 아래 살레르노로 망명해야 했다. 노르만인은 바이킹 족으로 전에는 도둑질을 일삼던 족속이었다. 그런 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그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교황은 1년 후 1085년 가슴에 한을 품고 거기서 쓸쓸하게 죽었다. 그리고 살레르노의 카테랄레(Catterle del centro storico)성당에 밀랍으로 만들어져 관에 뉘어 있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망명지에서 죽노라.” 교황이 힘이 있었을 때, 칸놋사에서 자신에게 용사를 비는 젊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좀 더 따뜻하게 용서하였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승자로서 패자를 잔인하게 이기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chiesadirom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