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락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구라파는 이제 우기철로 접어들고 있다. 우기 철에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은 뭐니 뭐니 해도 벼락이 아닌가 한다. 지축을 흔드는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찾아오는 천둥과 벼락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낙뢰로 인해 매년 10만 명 이상이 피해를 당한다고 한다. 2014년 낙뢰관측 정보에 의하면 상반기에 총 25897회 번개가 쳤고,11,266회 낙뢰가 발생했다. 가장 많이 치는 시간대는 16시요, 2608회를 쳤고, 가장 많은 달은 6월로 2809회, 그리고 도별로는 경기도가 36,913회로 최고 기록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벼락을 7번 맞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섬머포드라는 영국 육군소령이 있었는데, 1918년 2월, 플랑드르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낙뢰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벼락으로 인해 하반신 마비로 전역한 그는 1924년에 2명의 친구와 낚시하고 있었다. 이때 다시 낙뢰를 맞았고 이번에는 그의 몸, 오른쪽 전체를 마비시켰다. 운명은 장난처럼 이어졌다. 1934년에 세 번째 낙뢰가 그를 내리쳤다. 그의 몸은 영구히 마비가 되고 말았다. 2년 후 죽은 그의 묘지를 낙뢰는 다시 공격했다. 낙뢰가 그가 묻혀있던 묘지에 떨어져 비석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난 8월에는 노르웨이에서 벼락으로 순록 떼 300마리가 한꺼번에 죽는 일도 일어났다(2016.8.31일자 일간지). 참으로 벼락의 힘은 강력하다 싶다. 이처럼 역사상 벼락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거나 다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벼락으로 인해 놀라운 반전을 이룬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우리의 위대한 선배 말틴 루터다. 말틴 루터가 대학 시절 친구와 함께 부모님을 뵙고 대학이 있는 에르프르트로 돌아가던 1505년 7월 2일, 지금도 밀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슈토테르하임(Stotternheim)근처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당시 미래에 대한 꿈과 낭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밀밭을 지나면서 나눈 대화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겠는지에 대한 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 루터는 법학을 목표하는 학도였으니 유명한 변호사의 꿈을 꾸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들이 대화가 한창 깊어지는 즈음에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더니 천둥 번개가 일어났다. 구라파는 구름층이 낮아서 천둥소리가 얼마나 큰지 오랜 경험으로 익숙할 법도 한데 지금도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신학교 시절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로마의 황제들이 천둥칠 때 무서워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곤 했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로마에 살아보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천둥과 벼락이 칠 때는 얼마나 굉음소리가 큰지 꼭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난다. 바로 머리위에서 벼락이 내리꽂는 것 같다.

지축을 흔드는 그런 식의 벼락이 떨어졌고, 그 벼락은 루터와 함께 꿈을 노래하던 친구를 저 세상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벼락으로 인해 곁에 있던 친구, 방금 전까지 희망을 노래하던 친구가 죽었으니 루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루터는 너무 두려워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정신없이 두려운 마음으로 성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했다. 믿음이 있었기에 서원한 것이 아니라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개혁자 루터를 부르시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벼락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다. 루터를 연구하는 학자는 벼락이 친구를 덮칠 때, 하나님은 루터에게 임재 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고 서원하게 하셨다고 한다. 그 벼락이 내리친 자리에 1917년 2m의 비석을 세웠는데 거기에는 ‘성 안나여, 도우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라고 기록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 다양하신 방법을 사용하신다. 벼락이 내리쳐 친구가 사망한 자리, 그 자리를 통해, 한 사람의 위대한 개혁자 루터를 하나님께서는 부르셨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은 루터로 하여금 늘 죽음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기억하게 하셨다. 고로 개혁의 횃불을 들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함께 하였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유는 나는 벌써 죽었어야 한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있음을 보너스로 여겼다. 그러기에 교황청의 서슬 시퍼런 공격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야 말로 벌써 죽었어야 할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아난 목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숨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chiesadirom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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