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죽어서도 고통당한 천재 파가니니

우리는 이 시대 잘못된 루머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패한 속성의 씨앗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들은 소문에 나름대로 각색하고 덧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유혹의 본능 때문에 사람들은 큰 상처를 입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황당한 소문 때문에 죽어서까지 고통당해야 했던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Niccolo Paganini1, 782-1840)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홍역이 창궐하여 동생은 죽었고, 그도 합병증으로 살 소망을 포기했는데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항상 눅진하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어린 시절 유일한 장난감은 아버지의 바이올린이었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어린나이에 연주자로 나서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연주는 표가 항상 매진되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뛰어난 연주실력 때문에 항상 고약한 소문이 따라다녔습니다. 청년 파가니니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인을 치열하게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애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 사실을 안 파가니니는 발작을 일으켰고,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칼을 여인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그 일로 여인은 죽었고, 그는 4년 동안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소지하도록 허락받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탁월한 연주법을 독학으로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실력은 대단하여 바이올린의 줄을 다 끊어버리고 G선 하나만 가지고 별 희한한 소리를 흉내냈고 상상할 수 없는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의 연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음과 정신을 흔들어 놓는 연주였기에 연주회가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은 미친 듯 무대로 뛰어올라가 귀신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바이올린을 샅샅이 훑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연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옴비노와 룩가의 여 군주, 엘리자(Maria Anna Elisa Buonaparte, 1805-)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으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혼절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수금을 탈 때에 사울에게 들었던 악귀가 떠나갔다고 하는데 그에 버금가는 연주를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로부터 많은 음악적 영향을 받았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1840년 파가니니의 추도사에 언급하기를,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겼으며 그가 그토록 매혹적으로 켜던 네 번째 현은 바로 그가 제 손으로 교살한 애인의 창자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리스트조차도 파가니니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은 악마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일반인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악가 슈벨트는 그의 연주를 본 후, 저런 인물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탄복했습니다. 당시 비엔나나 베를린사람들은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후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의 연주회를 관람한 장면을 묘사한 화가에 의하면 남자들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무대 위로 뛰어오르려는 여자들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의 연주는 도도하기만한 영국인들을 또 미치게 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회는 표 값이 보통 연주자의 몇 배나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회는 항상 표가 매진되었습니다. 얼마 전 정명훈 선생의 스칼라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스칼라에서 심포니 연주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표가 매진되어 극장 앞에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습니다. 그 정도로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서 정명훈 선생님에 대한 인기가 높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가니니는 결국 니스에서 후두 결핵으로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따라다니는 소문 때문에 그 천재성에 대해 사제는 그가 사탄과 결탁하였기에 그런 기막힌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장례를 거절했습니다.

주교는 제의하기를 사탄의 도움으로 벌어들인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납한다면 이를 참회의 표시로 인정하고, 장례를 허락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할 수 없이 모든 재산을 기부했고, 1년 뒤 1876년 파가니니가 죽은 지 36년 만에 결국 로마 당국으로부터 청원이 받아들여져 드디어 가톨릭의 전례에 따라 파가니니의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통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구라파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바이올린은 현재 제노아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악기는 악마가 붙어 있다는 소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연주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귀한 악기가 박물관의 유리상자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의심어린 눈길을 견디어내기도 너무 힘들지 싶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파가니니 같은 천재가 나타나 2백 년 동안이나 켜켜이 쌓인 먼지를 훌훌 털어 내고 그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바이올린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날을 소망해 봅니다.

chiesadirom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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