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시스 (1)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많은 신앙인들은 말합니다. “성프란시스는 바울 이후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은 그 만큼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아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은 누구보다 자기 부인이 철저했고 지독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같은 텍스트인 성경을 읽고 또 설교를 듣고 묵상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고의 바운더리가 같고 삶의 방향이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가 남긴 족적은 8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온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여 그의 사역의 현장이었던 아시시(Assisi)로 몰려들게 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변화무쌍하게 옷을 갈아입지만 영적인 자리는 항상 그대로이기에, 인생은 항상 목이마릅니다. 그래서 허허롭고 허전해 합니다.

우리가 허허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분명하게 구주로 영접하고 수시로 자신을 영적으로 점검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온통 눈만 뜨면 물질적인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분명한 믿음과 철학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침몰당합니다. 사실 그처럼 찬란하게 보이는 대상도 손에 잡는 순간 별것 아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와가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여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해 안달해야 했던 선악을 알게 한 나무의 열매는 그것을 따 먹자마자 하나님 같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어야 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 곁에 있을 때 행복하고 평안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슬픈 역사를 알고 있으면서도 불나방처럼 자신이 죽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불가로, 불가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지만 그 길을 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힘들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H대 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온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이미 유명인이었습니다. 유학 오기 전 동아미술대상을 받았으니 그분의 미래는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함께 유학하는 친구들의 조각 작품은 쉽게 팔리는 데 정작 자신의 작품은 팔리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얼마나 참담했을 까요?

어느 날 밤늦게 먼 길을 달려 내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소연을 들으면서 밤을 하얗게 새워야 했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그가 한말의 키포인트는 자신의 예술성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평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값비싼 돈을 지불하고 평론가의 달짝지근한 칭찬의 글을 기대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차라리 성악 공부가 낫다고 말입니다. 성악은 수많은 청중 앞에서 “빵” 소리를 내면 금방 청중은 그의 실력을 알게 되는데 미술은 평론가의 평이 절대적으로 청중의 마음을 좌우한다는 거였습니다. 고로 순수미술로 갈 것이냐? 아니면 상업성으로 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순수 미술로 가라고 고함치는데 그 말을 따르면 배가 고프고, 상업성으로 가면 배는 채울 수 있는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다는 거였습니다.

역시 신앙의 길도 비슷하지 싶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머리 깎고 맨발로 탁발하는 일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부유한 아버지를 따르기만 하면 아시시에서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로 인해 노력 없이도 앞날이 보장되었습니다. 앞날의 신분 상승이 보장되는 멋진 길을 왜 성 프랜시스는 포기했을 까요? 왜 당시로 보면 바보 같은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일 까요? 그는 십대 끝자락에 군인으로 차출되어 10여km 떨어진 페루지아(Perugia)와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이태리는 도시국가였기에 심심하면 가까운 이웃도시와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어 페루지아의 감옥에 갇혀 일 년여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절망적인 곳에서 영원을 추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수감되었던 페루지아의 감옥은 축복의 현장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찾아올 수 있는 감옥, 그 감옥을 찬란한 여명이 빛나는 천국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랜시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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