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세상은 항상 위인이 태어난 장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다. 또한 현대인은 약삭빠르게 위인이 태어난 장소를 비즈니스와 연계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장소가 제일 중요하다 싶다. 동문 중 한 사람은 선배가 어느 수도원 특정한 바위에서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간증을 듣고 오로지 그 바위를 찾아가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 장소는 더 많은 영향력을 주는 곳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성프랜시스가 변화 받은 아시시는 80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로 넘쳐나고 있음이 그 사실을 증거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어거스틴이 회심했던 장소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다. 그의 전기를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밀라노의 정원으로만 표기되었지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명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라노를 수 없이 방문했지만 그곳에서 사역하는 친구 역시 어거스틴이 회심한 정원을 밀라노 중심에 있는 공원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수용하기에는 의구심이 일었다.
마침 밀라노에서 모임이 있었고 또 일찍 끝내게 되어 여유가 있기에 어거스틴이 회심했던 장소를 찾아보자고 제안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았던 어거스틴의 회심했다는 장소를 카톡으로 보내달라고 교우에게 연락하고 출발했다. 막상 카톡으로 도착한 장소를 알려주자 P목사는 그곳은 5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하여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오월의 푸르름이 가득한 시골길을 찾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윽고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차를 세우고 건너편에서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는 자매가 있어 물었더니 찾고자 하는 곳이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다만 그곳은 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파킹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쳐준대로 통로를 따라 내려가니 왼쪽으로는 아담한 성당이 있고 성당 앞에는 광장(Piazza)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까사고 브리안자 꼬무네(Commune di Cassago Brianza)라는 간판이 있다. 그 간판 아래는 갈색으로 어거스틴의 공원(Parco S. Agostino)이라고 쓰여 있고 화살표가 오른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즉 성당이 있는 왼편의 정원이 어거스틴이 회심했던 장소라는 표시였다. 그곳에는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여러 군데 남아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어거스틴에 대한 그림 세 장면이 새겨져 있었다. 정원이 평평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극심한 영적 갈등에 처해있을 때 마침 담 너머로부터 어린아이들의 동요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들어봐, 읽어봐 라는 노랫말이....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 노랫말을 사용하여 어거스틴의 마음을 뒤흔들어 버리셨다. 그래서 성경을 들고 폈더니 로마서의 말씀이 눈이 들어”왔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어거스틴은 성령의 만져주심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 철저히 무너지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는 어머니 모니카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였고.... 오로지 아들 어거스틴의 변화를 위해 3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해온 그녀였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동안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여주셨으니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모니카를 춤추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니카는 밀란으로 돌아와 당시 밀란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에게 아들을 세례 받게 했다. 마니교에 심취했고 정욕에 눈이 어두워 여인과의 동거생활로 아이까지 낳은 아들이었다. 이제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어거스틴은 거룩한 결단을 도모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가기 위해 로마의 오스티아 항구로 왔다. 그런데 마침 로마는 정치적인 문제로 항해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배편을 기다리던 중 모니카는 말라리아에 걸려 8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했다. 어거스틴은 깊은 슬픔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때 모니카 여사는 54세, 어거스틴은 33세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수도원을 세우고 평생을 거기서 나오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의 깊은 학문은 사도바울의 은혜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개혁자 말틴 루터나 칼뱅 그리고 요한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사람의 변화는 놀라운 역사를 창출한다. 그가 은혜 받는 장소인 밀란의 정원은 새로운 감격을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