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일까? 지난주, 달라스에서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가지지 못했던 목회 연구모임이 있었다. 밤을 새우며 만났다. 목회자들의 만남은 항상 신비롭다. 특별할 것도 없고, 세상사람처럼 알콜 먹거리들이 없음에도, 웃음소리 기도소리 환호성이 그치지 않는 그런 밤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종일 설교와 모임을 입술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음에 놀란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못할 만큼의 수다스런(?) 만남의 밤을 보낸 것이다.
달라스에서 돌아오는 집까지는 다섯 시간이 족히 걸리지만, 밤새 들었던 대화들을 곱씹다 보면, 이보다 더 긴 시간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연구모임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뭔가 아카데믹한 형식을 찾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플라톤의 ‘심포지엄’마냥 아주 자유롭다. 나눈 이야기는 온갖 주제들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조국교회와 미주 한인 이민교회들, 섬기는 교회와 자신의 남은 미래의 목회를 생각하며 나눈 대화들이 주로 생각난다. 이 대화들 중에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어찌보면 이 대화들은 그저 사적관계에 기반한 작은 소모임의 소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주의 종들의 평소 진지한 고민이라고 할 때, 교회와 목회에 대해 이렇게 주저리 나열해 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정체성을 잃어가는 교회와 성도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정체성’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신앙고백’이며, 이것이 현실화되어 드러난 것이 ‘교회론’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의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보이는 성전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관점이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삶, 그리고 우리의 목회는, 말씀의 신앙고백 위에 성경적인 참 교회를 세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영상시대를 통해 진리와 비진리가 아주 혼잡, 혼돈스럽게 전달되어 온다. 빨리 빨리 순발력있게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될 것이 없어 보이는 세상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그렇게 흘러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턱대고 길을 떠나고 보는 어리석은 나그네가 아니라, 더디고 힘들어도 이정표를 확인하며 한걸음 두걸음 걸어가는 지혜로운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그 중심에 올바른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지는 교회, 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최우선이 되는 복된 성도, 그런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 이를 통해 교회는 그 영광을 아름답게 드러낼 것이다.
미셔널 처치에 대한 강조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하지 않으면, 결국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생기없는 마른 뼈와 같은 단순히 몰려든 무리(Just Gathering)로서의 성도들에게, 말씀과 성령의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에 대해,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혹자는 교회가 왜 더 필요한가? 이 지역에는 기존의 교회가 그 역할을 맡아 있는데, 왜 교회가 개척되어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 영역확장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과연 전도할 대상이 없는가? 과연 교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만큼 교회는 그 지역에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전도할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도할 사명자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명에 힘쓰는 교회 참 교회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내부총질 같은 일들로 인해, 싸우기도 전에 패해버리는 일들이 교회에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동력을, 선교적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진력하도록 해야 한다. 코로나와 어려운 시기를 지나도 선교적 관점을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할 때, 생기가 넘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게 될 것이다.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과 생기 넘치는 교회가 비례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어 주시는 사역을 생각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생(生)개척의 가능성
생(生)개척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을 많이 한다. 예전처럼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건물 공간과 강단 그리고 음향시설과 간판만 달면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는 때가 되매 절로 어린아이가 자라듯이 자라게 되는 시대가 있었다. 아마도 그런 시기는 이제 코로나를 지나면서 급속하게 말라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귀납적으로 설명하면서 개척이 멈춰진 교회 상황을 변론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은 개척이 필요없는 그런 무용한 시대가 되어 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더 많은 코로나 불신자가 생성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럴 때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기존의 교회가 캠퍼스 교회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의 한인 이동 경로의 포석(?)을 두는 방식으로 교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될 때, 훗날 어려운 시기가 찾아온다 하여도, 미래를 대비하는 형태의 성장과 부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생개척의 가능성을 기존교회가 가지는 캠퍼스 건축과 잘 연결해서 실천하면 아주 좋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 여겨진다. 혼자하는 생걔척이 아니라, 기존교회와 연합하는 개척이 될 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본다.
불 꺼진 주일 밤의 회복
온전한 주일 성수는 농부의 ‘종자 씨앗’같은 것이다. 과연 이 시대에 주일 성수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는가? 한 주간의 삶의 휴식을 예배 가운데 만족할 수 있을까? 과연 농경사회에나 가능한 형태가 주일 성수인 것이고, 오늘날 같은 초인터넷 시대에는 합당치 못한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일 오전에 드리는 한 번 예배의 편리함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구하게 될 때, 새로운 길이 보여질 것이다.
달라스의 손해도 목사는, 예배의 회복을 강조하며 그 첫 단추가 ‘온전한 주일 성수’임을 말한다. 그는 교회 앞에서 주일 성수를 강조하여 받는 복이 이만저만 아님을 말한다. 그는 주일 아침, 본 에배를 캐롤톤에서 드린다. 오후 예배는 알렌에서 드리고, 저녁에는 커머스라는 곳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는 그림을 그리고 준비한다. 그의 지론이 무엇인가? 주일 밤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주일을 성수하게 될 때, 교회는 흔들림 없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광폭사역으로 주앞에 쓰임받는 사역이 될 것이다.
예방 목회의 부흥
목회가 좋은 모습의 부흥을 이루어갈 때, 선배 목사님들의 들려주신 교훈이 생각난다. ‘속도 크기 숫자에 속지마라’는 말씀이다. 특별히 성장 지향적이 될 때, 간과해버리는 교회의 갈등 요소들이 많은 노력과 수고를 일순간에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예방 목회와 같이 갈등을 미리 설명하고 중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회와 제직회에 중요한 안건이 올려질 때,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미리 설명하는 것도 좋은 표본이 될 수 있다. 당회원이 어떤 사역에 대해 질문을 하고 또 답을 듣게 되면, 답을 들은 후에도 질문한 사람이 어색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리 질문을 생각하고 최선의 답을 준비해서 전하는 것을 권한다. 사역에 앞선 모두에서, 사역의 동기, 재정, 담당자의 역할 등등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시끄러우면, 성도는 조용히 떠나간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과 같이 자신의 선택적 정보취합의 길이 여러 방편으로 열려있는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그가 선대하여 주시리라
대형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잘 마치고, 중형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부임해서 최선의 목회를 감당하던 목회자가 어려움에 처했다. 생각해보면, 이해 가능한 그런 일들이었지만, 사단이 틈을 타고 들어오니, 교회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결국, 교회는 혼란의 과정을 지나면서, 그 목회자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나, 작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가까이서 그 모든 것을 듣고 보았던 필자는 기도할 때마다 그의 형편에 대해 지극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가 오늘 말했다. 자신의 삶에 닥친 어려움들을 통해, 많은 고난의 시간들을 지나왔는데, 결국 자신이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주의 종된 저를 선대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멘.
그의 고백이 계속 마음을 울려왔다. 주가 그의 종을 선대하여 주시리라! 이 믿음과 확신이면 되겠다 싶은 마음의 기대를 가지게 된다. 목회가 잘 되면 목회를 계속하고, 목회가 안된다 싶으면 목사를 그만 둬 버릴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는 주가 세우신 목자가 아니다. 목자의 소속은 하나님의 영원한 부르심 속에서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찬양이 있지 않은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목회 평편과 세상의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의 선대하심도 분명하게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그가 책임져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davidnjeon@yahoo.com
08.27.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