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회복과 축복

- 교만, 실패, 멸망 -
전남수 목사

예배, 회개의 눈물

 

아무리 생각과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한 인생도 한가지 기준을 넘지 못하면 실패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한가지 그 기준이 무엇인가?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한다는 원리이다. 구약의 수많은 왕들의 역사를 보라. 오직 한가지 이유로 흥망의 역사를 가져왔다. 예배에 실패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섬기고 좇았을 때,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가문, 그가 섬기는 나라까지 망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왜 그런가? 예배에 실패는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하늘 문이 닫혀 버리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항변한다. “인생은 원래 죄인이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일 따름인데, 사람이 다 실수가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예배 한번 잘못 드렸다고 그렇게 버리고 망하게 하시면 어쩝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할 수만 있다면, 결국은 회복이 될 터인데, 그런데 예배에 실패한 영혼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회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배에 성공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의 대표적인 현상인 ‘회개의 눈물’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교만과 예배의 실패

 

단적인 예가 사울 왕이다.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 출신인데, 베냐민 지파는 아주 약하기 그지없는 지파였다. 그 베냐민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한 기스의 가문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탄생한 것이다. 도저히 왕이 나올 수 없는 그런 지파, 가문에서 왕을 배출한 것이다.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할 때, 우리는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될 때 당연히 반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성하는 것이다. 부족한 나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워주시고 도와주셨노라고,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며 겸손히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부족한 나를 축복하신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하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다.

사울 왕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겸손했다. 성령도 경험하고 방언까지 할 정도로 은혜가 충만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가지를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기 생각과 능력을 더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 보다, 스스로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자기 머리에 씌워진 왕관을 지켜보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보다 왕의 자리가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한마디로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은혜를 잊어버림과 동시에 아주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교만에 빠진 것이다. 

교만은 위치를 지키지 못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울은 높아진 마음으로 교만이 인도하는 실패의 지름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인데, 바로 예배의 실패이다. 교만하면 예배가 시시하게 여겨진다. 예배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항복시키지를 못한다.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회개할 수 있는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린 것이다.

 

예배의 실패, 회개의 부재 

 

사람은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실수를 회개하고 돌이키려면, 은혜가 심령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예배의 실패를 통해 은혜를 덧입는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리니, 결국 그 인생은 패망의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예배에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들리지 못하고 결국은 실패자의 길로 달려가게 된 것이다. 

사울 왕의 교만은 예배의 실패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쟁을 앞두고 사울 왕이 사무엘 선지자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다. 전쟁을 하려면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예배를 위해 사무엘을 기다렸지만, 약속한 사무엘이 빨리 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려 버린다. 예배를 해치워 버린 것이다. 사무엘이 와서 사울 왕을 책망하자, 그가 대답한다. ‘부득이해서’ 그렇게 했노라고 말한다. 부득이하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할 수 없이, 억지로, 안할 수는 없고’ 그래서 해 치웠다는 의미가 된다. 

예배를 안 드릴 수는 없고, 예배를 드리고 전쟁을 치러야 하니까 형식적으로 그냥 해치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속에 뭐가 없는가? 잘못을 범하고도,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자리에서 때늦은 후회일지라도 사무엘이 책망할 때, ‘잘못했습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제발 나를 위해 제단을 쌓아주세요.’ 그렇게 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회복되고 살아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아니하고, 오지 않는 사무엘과 당시의 상황들에 대해 원망과 핑계하기에 급급했다. 그 모든 핑계 속에 잘못을 회개하지 못하는 악한 심령이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배의 실패, 삶의 실패 

 

예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우리를 살리는 회개의 심령을 맛보는 것인데, 예배를 실패하고 나니 이를 회복할 길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회개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게 되었다. 블레셋에 의해, 자신만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한날 한시에 세 아들까지 그렇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막둥이 므비보셋은 도망치다가 유모의 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가문이 멸족하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교만함이 예배의 실패로 드러났으며, 그 예배의 실패가 자신과 가정 가문, 국가의 실패와 위기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울 개인에게 나타난, 실패한 예배자의 결론을 보아야 한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가? 길보아 산 위에서 죽었는데, 목이 잘렸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시체가 벧산 성벽에 걸렸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목이 잘린 채로 그 시체가 한참이나 떨어진 성벽까지 아마 질질 끌려서 갔을 것이다. 예배가 실패하고, 회개에 인색함으로 하나님께서 한번 버리실 때 너무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버리시면, 인간이 가지는 명예와 형색과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너무 절절하게 그 느낌이 다가온다. 사울 왕이 죽었던 길보아 산에서 벧산 성벽을 가려면 개울도 지나가고 돌밭도 지나가야 하는데, 그곳까지 목이 잘린 채로 질질 끌려가서 벧산 성벽에 턱하니 걸린 게 사울의 마지막이었다고 할 때, 정말 끔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인가? 회개하지 못함이었고, 회개의 은혜를 예배 가운데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인생의 죄악된 교만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만큼은 온전하고자 몸부림을 쳤더라면, 그는 회개했을 것이고 회복이 되었을 텐데, 그 죄가 예배와 관련되다 보니 살길을 찾기가 아주 어려웠던 것이다. 

 

회개와 회복, 결론

 

예배가 무너지면, 회복될 틈이 없다. 그렇게 끝까지 가다 보면, 인생은 정말 비참한 종말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오늘날도 죄악의 유무를 넘어서서, 예배에 간절함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성공 유무는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신앙이 가정, 자녀, 가문, 공동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배에 은혜받지 못하고, 회개의 눈물이 말라버리지는 않았는가? 다시 그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함이다. 

사울 왕에 비해 다윗은 더 악하고 험한 죄를 지었습니다. 간음죄, 살인교사 등의 죄를 지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받아주시고, 받아주실 뿐 아니라 다윗 때문에 자손의 왕위를 보전한다고 약속도 하셨다. 그런데 사울 왕이 받은 징계에 비해, 다윗은 너무 경미한 징계를 받았다. 사울은 애매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처럼 성적인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단 한 가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예배에 실패하고, 회개하는 심령이 되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사울과 다윗의 징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큰 것이었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 회개의 여부가 회복과 심판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 회개의 이면에 예배가 자리하고 있다. 다윗은 예배의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참 예배자에게 주시는 회개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를 살리는 길이 되었다. 

예배에 온전함이 있을 때 죄의 사유하시는 회개의 은혜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예배가 실패할 경우, 회개의 영이 떠나가고 마침내 멸망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길이 무엇인가? 내가 사는 길이 무엇인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 범죄 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 은혜에 가림을 받을 길이 있기에 소망을 품게 된다. 

힘써 예배에 나아와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설교자를 통해서 듣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 회복이 된다. 회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가 되지 않고 회개할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결국은 망할 때까지 달려가는 것을 본다. 그것이 또 주변과 가정, 가문까지도 함께 해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가면서, 더욱 예배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배 가운데 회개의 영이 식지 않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davidnjeon@yahoo.com 

08.13.2022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