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

- 예배를 회복하라
전남수 목사

소설같은 이야기

 

뉴욕에 계신 어느 목사님이 전해주신 소설 같은 그런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하고 나이 차이가 열네 살밖에 나지 않는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라는 분이 청소년이었을 때, 어쩌다가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들의 잠재된 의식 속에는, 항상 자신의 출생 자체가 주변에 축복이 되지 못했으며 환영받지도 못하는 그런 못난 인생으로 출발했다는 그런 의식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아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늘 만사에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생긴 외모가 아버지는 머리가 안 빠지고 얼굴이 길쭉한 미남형인데 반해, 아들은 머리가 벗겨져서 어떻게 보면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나 부자지간이라고 소개하면, 많은 사람들이 농담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로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아들에게는 아주 짜증나고 못마땅해하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신을 그렇게 너무 일찍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를 원망해가며, 이 모양 저 모양 정 없는 부자지간의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 아들도 이제는 장가를 가게 되었고 나이도 조금씩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마 하지 말아야 될 패륜아 같은 짓을 그날 밤에 하고 말았던 것이다. 술을 마시고는 아버지를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향해 ‘너하고 나하고 몇 살 차이냐?’하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후로도 그런 일들이 여러 번 반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아버지는 아들한테 맞는 것이 겁이 나서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고,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동안 자신이 술김에 한 것이니, 자신의 행동들을 용서해달라고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이미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 아들만 보면 너무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식이 용서를 빌어도, 또 옆에서 누군가 조언을 해도, 그 아버지의 그 마음은 잘 바뀌지를 못했다고 한다. 마치 뭔가에 붙잡혀있는 듯이, 뭔가에 씌인듯이 전혀 열릴 생각을 못하더라는 것이다. 무엇으로든 회복시킬 방법이 전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런 부자지간의 상황을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아버지는 뉴욕에서 그만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임종이 임박한 중에도, 그 아버지는 혹시라도 그 아들이 병원에 찾아올까 봐 교회 목사님에게만 연락을 하고는 일부러 격리된 병실에서 조용히 임종을 맞이했다고 한다. 목사님도 다급한 중에,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아들도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질서의 파괴와 혼돈

 

한 가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참으로 안타까운 그런 일이다. 가족 간에도 용서와 화해가 되지 못하는 불행한 일의 정형이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질서가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다. 생명의 질서, 영적인 질서, 인간에게 주신 운명 같은 질서, 아버지와 아들의 천부적 관계 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 부모가 자식을 무섭게 여기도록 만드는 모든 것이 영적 질서가 심각하게 파괴되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것을 ‘혼돈과 파괴’라고 할 수 있다. 혼돈과 파괴의 형태 속에서는 모든 관계들이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만들어 가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친밀한 부모 자식 간에, 자녀들 간에도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질서가 없으면 아름답지 못하다. 인생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분명한 질서가 있다. 질서를 파괴하면, 죄가 찾아들고, 마침내 멸망과 파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단 마귀가 좋아하는 것이요, 악한 영이 좋아하는 것이다. 사단은 질서의 파괴자이기 때문이다.

 

질서의 하나님, 축복

 

성경의 예를 찾아보자. 다윗이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 나이 들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때가 되었을 때, 신하들이 다윗을 위해 젊은 여자아이 동녀 하나를 구해 와서 그에게 붙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 여자와 부부관계로 산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있어도 그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윗이 죽게 되니까 아들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달려와서 말한다. 아버지가 데리고 살았던 그 여자를 자신에게 주면, 동생 솔로몬이 왕이 되어도 내가 이것을 합당하게 인정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여자를, 아버지가 손대지 않았다고 하여도, 아들이 와서 그 여자를 달라고 하는 것은 엉터리 막장드라마 같은 내용이 되는 것이다.

권력의지가 있던 밧세바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 아들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딜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와서 이야기를 한다. 그때 솔로몬의 대응이 무엇이었나? 그 형을 당장 쳐 죽여 버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나라를 축복하신 것을 보게 된다.

왜 하나님이 솔로몬을 축복하셨을까? 아주 명백하게 안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인데, 이에 철저하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권력에 집중하여 눈이 가려진 어미 밧세바에 비해, 초기의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릴 만큼의 깨어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질서를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권력보다, 부모와 자식간의 질서를 무너뜨림에 대해 아주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름답게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를 지킬 때, 그 질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며 아름답게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타락, 은혜와 율법

 

특별히 신앙이 좋으면, 질서를 잘 알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이 떨어지는 순간, 타락이 찾아오고 혼돈이 찾아오는 법이다. 타락이 무엇인가?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시험 든 성도가 외치며, 은혜 떨어진 교회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피땀 흘려 벌은 걸 가지고 교회 갖다 줬더니, 목사가 혼자 톡 털어 넣어서 자기 입에다 다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대단히 문학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다. 십일조를 율법으로 우기면서, 당연히 행해야 될 의무를 그저 목사가 성경해석을 자기 입장에서 하지 못한 부적합한 율법주의 탓으로 몰아가는 이상한 행태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들, 주일성수와 안식일, 십일조, 새벽예배 등등에 대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은혜이고, 하기 싫은 모든 것은 모두가 율법이라는 폄훼를 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영적인 질서를 모르기 때문이다. 질서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당연한 감사의 풍성과 의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복, 질서의 아름다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질서의 회복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곧 회복이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세상에도, 자연에도 모든 것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매뉴얼, 질서가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질서를 따라 행할 때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이다. 예배의 질서를 알고 지키는 것은, 그저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가 훼손되고 무너짐으로, 그 영적 질서의 파괴로 인한 삶의 양식들의 파괴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회복할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통해 삶의 질서를 하나님 앞에서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한번 해치우는 예배, 안 드리면 찜찜하니 차라리 드리고 오자는 태도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회복의 아름다운 질서를 무시하고 혼돈케 하는 것이다. 

 

영적질서의 회복

 

이렇게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 영적 질서를 바르게 세우는 것을 회복이라고 한다. 단순히 처음으로 돌아가는 회귀(回歸)가 아니라, 본질로의 회복(回復)이 예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질서의 기초위에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아름다운 질서가 바로 예배이다. 구원의 회복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최고의 표식도 무엇인가? 온전한 예배이다. 온전한 에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출발하는 것이다. 

예배를 상실한 시대를 살아간다. 토저 목사님은 예배가 상실된 이 시대를 표현하기를,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보화가 숨겨진 그 밭을 산, 바로 그 농부의 마음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교회의 예배가 마치 잃어버린 보석 같아져 버린 것이다. 면류관이 있지만, 이 면류관에 보석이 없다. 교회는 온갖 것으로 빛이 나지만, 가장 빛나야 할 보석인 예배가 실종되었다. 오늘날 교회에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러나 없는 것은 오직 예배뿐이라고 까지 말한다. 교회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 그것이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배이다. 

예배가 실패하면, 하나님과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무너진 것이므로, 그 인생도 실패가 된다. 그러나 예배가 회복되면, 인생은 회복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 세우신 질서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

davidnjeon@yahoo.com 

07.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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