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듣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고,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되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Impossible이라는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I 'm possible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점 하나로, 행동 하나로 우리들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늘 행복하면 좋겠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보니 이런저런 조어(造語) 놀이가 등장하는 것 같다. 어려움 중에서 삶을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긍정적인 의미가 행간에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어 놀이 정도로 위기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의 위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삶의 위기는 신앙의 위기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단어이지만, 여전히 우리 옆에서 기승을 부리는 단어가‘코로나’라는 단어이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한인 이민교회가 큰 위기를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가 활성화되었던 탓에, 교회로 모이는 성도의 숫자도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이 뚜렷했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부가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조국 한국에서는 1만 개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발표가 있었고, 이곳 미주의 대도시의 교회들에도 작은 교회들은 재정과 시설 모든 면에서 큰 위기의 소식이 전파되었다.
게다가 백신과 예방의학 등으로 많은 면에서 상황과 여건이 호전되었음에도, 그동안 비대면 영상 예배를 드리면서 경험했던, 더 나은 시설과 환경을 따라 영상물 자체에 집중하던
‘눈길과 손길’이 그들의 발걸음을 여전히 가정 안에 묶어두게 만든 것이다. 마음껏 예배를 드리게 되었음에도 그 습관을 유지하거나 혹은 가까운 곳의 대형 교회로 이동하는 예가 아주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입을 모아 ‘교회의 건강하지 못함, 교회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근본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과연 교회에 위기라는 말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데, 어떻게 교회가 위기를 당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교회가 문을 닫고, 교회가 어려움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교회의 위기가 아닌 다만 연약한 성도인 우리 ‘신앙의 위기’ 일뿐인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환경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성도의 성도 다움을 말씀으로 지켜내지 못할 때, 그것이 결국 위기가 되고, 교회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신앙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
신앙의 위기, 교회의 위기는다름 아닌 예배의 위기다. 예배는 우리의 전 인생을 살리고도 남음이 있다. 한 사람이 예배에 성공하고 있다면, 그는 승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될 것이고, 만일에 어떤 한 사람이 예배에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실패한 미래를 살고 있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에 최고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표현은 ‘예배’이다. 진실한 삶의 회복을 원하는가? 세상의 변혁을 원하고 있는가? 삶의 승리자로 영원히 기억되고, 주님의 칭찬과 인정과 상급 받는 삶을 원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먼저 예배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삶의 회복과 축복은 바로 거기서 시작하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코로나 시기를 지나가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소중한 예배를 상실한 채로 살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드려지는 것인데, 사랑은 결코
‘시간 때우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자신의 종교성만 채우기 위한 예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 은혜가 있는데, 이젠 그 은혜를 찾을 길이 없으니 이젠 자신을 타당화 시켜간다. 지금은 은혜받지 못하지만, 과거에 나도 은혜를 입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재 자신의 신앙생활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함량 미달임을 증명하는 말일 따름이다.
이러한 종말 시대에, 우리는 회복을 위해서 다시 예배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두가 가장 중요한 축복의 통로, 회복의 도구인 예배에 전심하지 아니하고, 다른 조건 맞추기를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복을 만들어가려는 기형적인 신앙의 세대를 살고 있지만, 이러한 물결을 거슬러 신앙의 본질 앞으로 다가가야 한다.
교회와 예배, 신앙의 기본기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고기잡이를 해서 좋은 수익을 얻고, 날씨가 궂은 날이면 그저 하늘만 원망하며 살던 평범한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저들에게 차별 없이 성령이 임하게 되니, 단 한번도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벗어나본 적이 없던 저들이, 평생에 단 한번도 해외여행을 해본적이 없던 저들이, 감히 쳐다 볼 수도 없고 생각의 상상조차하기 힘들었을 땅끝을 보고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 반대편까지도 서슴치 않고 달려갔으며, 타향과 타국에서 순교의 귀한 제물이 되기까지 아름다운 비져너리의 삶을 살아내었던 것이다.
복음의 말씀들이 그대로 믿어지게 되니, 아무런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원래 복음과 말씀이 그런 능력(DUNAMIS)을 본질로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 어디서 들려지는가? 교회와 예배를 통해서 듣고, 반응하며, 마침내 평범하기 그지없던 인생이 위대한 변화의 삶을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축복과 회복의 원형이다. 영적인 위대한 꿈도 예배 가운데, 예배를 통해서 꾸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은혜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집에서 기러기를 키워서 그 알을 파는 직업을 가진 이가 있다. 기러기 알과 기름이 동맥경화, 간염, 지방간에 효능이 있다는 소식에 꽤 괜찮은 직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러기는 철새가 아닌가? 철새는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오르는 그런 동물인데, 어떻게 집에서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영업비밀 같은 이야기이지만, 기러기의 털을 몇개 빼 버리면, 주위만 뱅뱅 맴돌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바다를 지나고, 구름을 벗 삼아, V자 대형으로 멀리 멀리 날아가던 기러기가 이제는 시골 동네 아저씨의 애완용 집 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원래 기러기라는 존재가, 창공을 날아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갈 수 있는 그런 존재였음에도, 뭔가를 빼 버리면 시시한 집새가 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독수리 날개치며 오름과 같은 삶, 높은 곳을 다니는 사슴의 발과 같은 삶을 원하시는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깃털이 빠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깃털 빠져버린 기러기가 되어 애완용 집새가 되거나, 독수리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참새처럼 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중심에 ‘예배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다. ‘예배’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떨리는 말이다. 온전한 예배자가 되는 것에서, 개인과 가정과 가문과 교회가 사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기라고 할 수 있다. 기본기가 단단해질 때, 하늘을 날아오르는 독수리 같은 영적 강자가 되어 믿음과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복잡한 세상, 온전한 성도
온전한 사람, 즉 성장과 성숙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지적인 것을 말한다. 믿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행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는 것에 따라 행하지는 않지만, 믿는 바에 따라서는 행하게 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신앙과 삶의 원리도, 그저 아는 데서만 끝나면 절대 신앙이 성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는 것과 믿는 일의 중심에 ‘예배와 복된 교회 생활’이 있다. 온전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배우고 익히게 된 그 믿음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삶이 복잡할수록 교회와 예배 앞에 단순하게 반응해야 한다. 지나치게 현실에 집착하고 몰두한 나머지, 기도할 힘과 시간도 놓쳐버리며 세상일에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때에, 무엇보다 여호와의 성전 제단, 구별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예배자로 나아와한다. 현실의 문제에 몰입하고 매이지 않으면서, 하늘의 하나님과 만나는 구별된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사를 제치고, 몸을 움직여
위기의 시대, 삶의 변화와 세상의 변혁을 도모하려면, 삶의 모든 일들 앞에 단순함이 필요하다. 신앙의 연륜은 우리를 단순하게 만들어간다. 그 정점에 교회와 예배가 존재한다. 참된 예배자는 복잡한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단순하게 어린아이 같이 기쁨으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잘 따라가는 자(계 14:4)로 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만사를 제쳐두고, 몸을 움직여 교회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온전한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구별된 장소인 교회와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서 살아가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7.1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