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는 교회, 장소적 교회의 회복

- 정한 시간, 정한 장소, 몸이 오는 신앙-  
전남수 목사

모이는 교회, 모으는 목회

 

교단의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웨비나(웹과 세미나의 혼용)에서 강의했다. 짧은 시간 동안, 목회적 관점을 가지고 코로나를 지나며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에 대한 소견을 나누는 일이었다. 준비하면서, 여러 시대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며 우리의 목회를 논하지만, 실제 특별한 것이 없지 않나? 하는 결론을 얻었다. 마치, 이삭이 아브라함의 그 우물들을 다시 파내며 물을 얻었듯이, 시대나 상황 조건이 달라서 강조되는 것이 다를 뿐, 목회는 예나 지금이나 특별히 다를 것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든다면, 한국 목회, 이민 목회, 특수 목회 등으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다고 하여도, 주일을 마음대로 변개할 것도 아니고, 주일을 지키는 방법이 달라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핍박과 박해가 심각할 때는 지하무덤에서 해골을 옆에 두고도 예배드리지만, 늘 우리의 신앙 기준이라는 것은,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몸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예배>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목회의 중심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강조점이 달라질 뿐이다. 그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목회를 제대로 감당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세와 같은 종말 시대의 끝자락을 살아가는 때에는, 무엇보다 ‘모이는 교회, 모으는 목회’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어쩌든지 모이기를 폐하는 이들의 모습을 역행하는 목회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아주 구체적인 대책 한 가지를 말한다면, 모이게 하는 ‘장소로서의 교회’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리주의, 개인주의, 상대주의 

 

코로나를 지나면서 특별한 목회적 현상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이 시대의 반 신앙적인 사고 형태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편리주의의 득세이다. 주일에 불편하게 굳이 교회 갈 필요가 있는가? 집에서 편하게 온라인으로 영상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침대 혹은 소파에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 예배를 시청 분석 판단하는 예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실제, 코로나를 지나면서 온라인 헌금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예배가 마칠 즈음이 되면, 은행 어카운트를 열어서 헌금을 센딩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참된 예물일까? 그날 은혜를 받았으면 많이 하고, 은혜를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면 헌금은 하지 않으려고 했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생각하게 된다. 

예배를 통해 나를 복종시키고, 말씀이 나를 꺾어야 하는데, 내가 말씀과 예배를 평가하는 그런 위치가 되는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주님이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주님이 싫어하면 내가 아무리 좋아도 나도 싫어요, 그렇게 해야 정상일 텐데, 모든 것을 자기가 싫으면 무조건 싫고 자기가 좋으면 다 좋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편리주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두 번째 사고의 흐름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결코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행 16:31)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신앙의 삶은, 반드시 그 선한 영향력이 집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과 이웃들에게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대로 예수 믿은 사람, 참 예배의 사람들은 그 이웃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고 나누며, 삶 속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개인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상대주의적 경향이다. 예전에는 필요한 정보나 신앙의 지식을 목사님을 통해 분별 되게 공급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생각을 먼저 정해둔 채, 자료들을 이리저리 모아 자신의 사상을 대변할 수 있는 도구들이 많다. 게다가 인터넷 영상시대를 통해, 설교를 마치 어떤 원고 발표문처럼 서로 비교하며 자신을 심판관처럼 세워두고는, 좋고 나쁨을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하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중의 말씀은 그저 설교자의 의견(Just his opinion)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도 충분히 목회자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판단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은 더 이상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없으며, 마침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변화의 아름다운 역사도 맛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 대한 관점회복

 

이러한 문제를 벗어나 온전한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가운데 '교회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강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흔히 교회가 무엇인가? 질문하면 아주 쉽게 ‘에클레시아,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에 방점을 두고 말한다. 이처럼 모임 자체를 강조하는 ‘에클레시아’의 개념과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예배의 활성화’가 장소로서의 교회를 약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는 비행기에서조차 탈 마스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교회는 그 회집에 있어서 이견도 많고 의견도 많고, 여전히 예전 같은 회복의 길을 멀리 보게 만드는 일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질문해 본다. ‘신자에게 교회는 무엇인가?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또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절로 하게 된다. 단순히, 에클레시아의 개념 속에서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정의만으로는, 온라인 시대를 지나가며 지극히 ‘편리주의, 개인주의, 상대주의’에 물든 성도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기에는 아쉬움이 아주 많다. 

 

구별된 장소로서의 교회

 

성경은 구별된 장소로서의 교회를 너무 많이 강조하고 있다. 구약의 성전과 성막, 회당의 역할과 신약시대 교회의 역할을 연하여 생각하여 볼 때, 굳이 신학적인 이견을 따져보지 않아도, 이들을 함께 한가지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장소로서의 교회를 생각해 보자. 주의 성전에 주님의 눈과 마음이 있다(대하 7:16)고 했다. 다윗은 누군가 자기더러 예배드리러 가자고 말하면, 그 소리에 마음이 기뻤다(시 122:1)고 말한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84:4)고 한다, 신약으로 건너오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행 1:4)고 장소를 지정하셨다. 그곳이 어디인가? 마가의 다락방이다. 곧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한 장소이다. 게다가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의 서신들과 복음증거의 내용을 통해,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를 바르게 세움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교회, 곧 천상의 교회 원리를 드러내려 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성경 자체의 변증을 보게 될 때, 참된 교회의 이해를 위해서는 에클레시아의 개념뿐 아니라, 장소로서의 교회에 대한 관점도 분명하게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보이는 것은, 늘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혹자는 코로나 시기에 드려진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니었는지?을 질문한다.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다. 박해가 있으면 해골을 옆에 두고서라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 최선의 예배이다. 그런데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한계 속에 드려진 예배를 일반화시켜, 이제는 교회에서 예배를 모여 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의 제한된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저 핑계할 수 없는 편리주의, 악하고 게으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기본, 주일예배

 

신앙생활의 기본은 ‘모여서 예배하고, 흩어져 전도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예배를 가볍게 여기면서, 흩어짐을 강조하는 교회와 개인은 결코 바른 신앙의 원리 가운데 세워질 수가 없게 된다. 특히, 흩어짐을 정당화하면서 ‘교회’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구역을 <지역교회 혹은 마을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영상물을 올리면서는 <티비 교회>라고 칭하거나, 가정을 교회로 칭하면서, 정한 시간에 구별된 모임으로서의 예배를 위한 교회의 정의를 자꾸만 희석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떻게 교회라는 이름을 이렇게 쉽게 쓸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게다가, 오늘날은 예배드리는 날로서의 ‘주일’의 개념도 희미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토요 주일예배’ 이름으로, 예배하는 거룩하고 복된 주일의 개념을 무색하게 하면서 교회 부흥을 주동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주일 예배를 토요일 오후에 드리고, 주일은 지역의 다른 교회를 찾아가서 봉사하라는 사역이다. 아주 이상한 개념이다. 이민 사회에서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영상예배를 드리는 이들 가운데서, 한국의 주일 예배를 이곳 미주에서 토요일 저녁에 영상예배로 시청하고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영상이 워낙 탁월하니 그렇게 좋아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날짜를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단 말인가? 

토요일에 주일 예배를 드리고, 주일에 파송하는 교회가 정말 이웃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진정한 마음, 과연 예배받으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내용일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웃을 돕기 원하는 마음이 진정이라면, 토요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교회를 분립하거나 성도들 파송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한마디로, 주일의 개념을 왜곡함으로, 교회 중심의 생활을 흐트러지게 만들고, 마지막 시대에 주님 원하시는 것과 반대로 가는 일들을 양산하게 된 것이다.

 

모이면 되고, 안 모이면 안 된다.

 

마지막, 종말의 시대가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어디서나 모이면 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예배로, 교회로 모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를 위해 장소적 교회가 회복되어야 한다. 빌딩 지상주의를 말함이 아니다. 빌딩 자체는 거룩한 교회가 아니지만, 정한 시간에 구별된 장소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처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집기 하나도 소중히 여기며 신앙생활을 했다. 게다가 ‘교회 가면 예수님 기다리신다, 교회 가면 예수님 만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넘어져도 교회로 넘어지고,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며 충성했던 많은 이들이 주님 만난 것을 간증하고 있지 않은가! 우찌무라 간조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과거 무교회주의 운동의 결과가 어떠한가? 10년이 지나도 선교사님들이 세례 10명을 베풀기가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로 몸이 오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로 몸이 오는 것이 믿음과 신앙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신학교 정원이 줄어든다고 한다. 미주에서는 영어권 사역자를 구하기가 어렵다. 이유가 무엇인가? 지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왜 없을까?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며 은혜받고, 수련회 가서 결신하고, 성회를 통해서 자원하는 심령들이 결국은 헌신 된 사역자들이 되었을 텐데, 모일 수가 없으니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예배로 모여야 한다. 성회를 하고, 수련회를 열고, 성경공부로 모이고, 교회로 모여야 한다. 모일 때 역사가 나타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장소적 교회의 개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davidnjeon@yahoo.com 

0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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