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과 고난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을 통해 거룩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훈련된 거룩이 삶의 고난을 제어하고 즐거워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유익하고 복된 것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의 나이테를 겹겹이 쌓아오면서, 세월의 연한 만큼 더 억세어지고 고집스러워지기도 한다. 자녀들에게 평생을 지나오며 늘 강조하는 말이 ‘사람 믿지 마라. 까만 머리 짐승(?)은 은혜를 베풀면 안 된다. 등등’의 말로서 원망과 한숨을 겹겹이 쌓고 있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이다. 삶의 길들을 지나오면서, 오죽했으면 저럴까? 싶은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참 신앙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고난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크고 작은 고난의 문들을 통과하며 삶을 경영한다. 그런데 모두가 고난을 통과는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고난을 통과하며 겸손과 성숙함으로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더 강퍅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장로님을 알고 있다. 교회가 어려워지면서, 노회와 교회재산 문제로 법정다툼을 하셨다. 굉장히 스마트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바른 말과 바른생활을 하셔서 젊을 때부터 후배들에게 아주 존경받는 그런 좋은 분이셨다. 그런데 교회가 분쟁에 사로 잡히면서 교인들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법정 소송의 당사자가 되면서부터 굉장히 바뀌셨다. 교회의 크고 작은 문제를 단순한 은혜의 관점으로 보지 않으시는, 아주 까칠하면서 까다로운 분으로 변한 것이다. 예전의 아주 똑똑하지만 인간적이었던 모습이 이제는 쉽게 말을 붙이기 조차 어려운 그런 까칠한 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굉장히 안타까운 형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난과 선택
그 장로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치이고 사람에게 낙심하는 그런 일들이 그렇게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일들을 지나갈 때, 잘 선택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악하고 추해서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기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에 대해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더욱 예배하며, 그 음성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게 되어 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 끊임없이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두는 것이다. 이것이 잘 훈련된 사람은 어려움의 고난이 찾아오면 가만히 있다가도 하나님 쪽으로 아주 빠르게 넘어진다. 오직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이가 없는, 아주 연약한 존재가 자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눈에 보이는 세상 행복의 조건을 채우기에 바빴던 삶을 내려놓으며, 고난 중에 더욱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그 감격과 기쁨을 얻는다. 그 자리가 어디인가? 거룩함이다. 주님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주님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어하면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살아가게 되는 것, 바로 거룩을 온전히 알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거룩함을 경험한 이후, 그는 세상에서의 모든 질곡 같은 고난의 문제 앞에서 당당하게 그 삶을 승리로 견인하게 된다. 그래서 거룩을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룩을 위해, 삶의 지향점들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은 것, 거기서 참된 인생의 행복이 시작된다. 사람이 조작적으로 만든 행복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고난을 통해 빚어주신 거룩으로 만들어진 행복이다. 삶 속에 녹아있던 세상의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마침내 거룩의 자리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운 듯이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하지 않으면 고난이 끝나지를 않는구나. 불같은 시험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흰 옷을 입혀 주시려는 것이구나!’
행복-거룩한 세마포
사람들은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악착같이 돈을 벌려하고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식이 보는 앞에서 거지같은 짓을 하면서도 돈을 모으려 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이 머리 들고 쳐다보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고자 한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들을 잔뜩 호주머니에 넣고, 혹은 그런 세상의 계급장 달린 옷들을 걸치고 살아간다. 어찌 보면 이 옷 저 옷 꿰매어 입혀놓은 거지와 같은 꼴의 형상이다. 그렇게 멀쩡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런 모습을 하고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미 거지 같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가 무엇인가? 마침내 삶을 비천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해서 달려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더러 행복해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저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실 따름이다.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해서는, 마치 거지 누더기 옷을 이리저리 걸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복해지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 닮은 거룩에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세마포를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세마포가 '거룩'이다. 쾌락이 인생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더욱 큰 갈증을 일으킬 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돈이 많고 출세 번영하게 되어 감사할 일들이 넘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없어도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서도 거지꼴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의 권력을 조금 더 품어보고자, 자신이 가진 신앙의 지조도 다 내어버린 채 독재 같은 정당에 기생하며 땅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계획된 고난, 주님 예배
깊은 예배를 통과하지 않고서, 말씀을 듣고 성령의 교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길이 없다. 스무 살 때 예수를 믿었다면 서른 살이 되면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육십 환갑에 이르렀으면 더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귀 사촌을 닮아 가고 있다면 어떻게 그 인생에 하늘의 복이 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참되고 온전한 예배의 생활을 통해 우리를 거룩으로 빚어가시고, 우리를 그의 임재가 머무는 행복자로 축복해 주신다. 그렇게 예배 가운데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방향 전환시키며,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된 고난’이다. 고난을 통해, 거룩하게 하셔서, 깨끗하게 하셔서, 당신이 임재할 수 있는 인격으로 씻겨 주시고 청결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고난이 오는 이유는 나를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닮아가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조그만 고난 앞에서, '예수를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있을까?' 하면서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물을 가져가시면서까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어떤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거룩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항상 예배 앞으로 나아가, 말씀과 성령 앞에 부복하며 항복하는 과정을 지나야 한다. 벗어 버리고 떨쳐 버리며,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자신을 세워가는 것이다. 그곳에 주님이 임재하시고, 주와 함께 하는 최고의 행복을 거친 세상 가운데서도 맛보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6.1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