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필연
인생에 우연은 없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 삶에 모든 순간이 필연임을 알게 된다. 삶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 사건이 필연 중에 필연임을 발견하게 된다. 매 순간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사람의 지혜일 수 없다. 성령의 역사일 따름이다. 더 나아가 이것을 알고 순종할 수 있다는 것도, 사람의 힘과 의지가 아니다. 오직 성령 충만의 역사이다. 자신의 인생에 닥치는 매 순간이 그런 소중한 한 시간임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나 신앙의 역사는 그냥 절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을 알고, 깨닫고, 그 깨달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위해 등을 들고 기름을 준비하는 예비된 신부의 삶이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할 세마포로 단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예정과 작정의 필연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택의 결과이다. 선택이 우리의 삶과 신앙을 만들어 간다. 시간과 사건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선택하기 전까지는 선택에 대한 결과가 희미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선택하고 나면 선택에 대한 결과가 분명해지고 삶은 다이나믹하게 힘 있게 전개되어 간다.
선택은 순종의 문제
창세로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신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을 요구하셨다. 생명 실과와 선악의 실과 앞에서 선택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생명과를 선택하면 생명이 풍성하게 되도록 해놓으셨다. 그러나 선악과를 선택하면 선악과의 결과인 ‘정녕 죽으리라’가 실체화 되게 말씀하셨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인생은 살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은 네가 져라 그런 의미로 선택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 중에 네가 선택할 것은 생명 열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택을 가르치시고 요구하신 것이다. 선택은 곧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평생이 결정되고 영원이 결정된다. 순종의 여부가 곧 선택의 내용이다.
믿음은 선택의 순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를 선택하지 않고 선악과를 삶과 신앙의 방향으로 선택함으로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모든 것을 상실하고 영생이 영멸 되었다.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그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정(선택)했을 때, 그는 복된 인생이 되었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 쫓음을 선택함으로 그 인생이 고기 잡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위대한 인생이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도 선택과 순종의 삶이다. 늘 경험하게 되는 일이지만, 인생은 하나님을 탓하며 자신의 삶을 원망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선택과 순종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최고 우선의 선택
오늘날 신앙생활의 행위 가운데 최고의 선택은 무엇일까? 순서적으로 말하면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은 분리할 수 없다. 기도하면 성경 읽게 되고, 성경 읽으면 기도하게 되어 있다. 기도와 말씀은 신앙생활과 예배의 본질이다. 그 어느 하나가 없다면 불균형이 되고 만다. 기도와 말씀, 예배의 본질이 회복될 때, 온전한 회복과 축복을 맛보는 복 있는 선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기도가 왜 선택과 순종의 최우선 제목이 되는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 호흡을 주심으로 생령의 삶이 시작되었다. 생령의 호흡은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 코에 불어넣어졌을 때 시작이 되었다. 사람의 호흡은 하나님이 주신 호흡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2장 15절 이하를 보면 그 생령의 호흡을 시작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셨다.
그래서 신앙생활적 측면에서 보면 호흡 있는 자가 양식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너무 중요한 것이다.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호흡을 멈춘 것이다.
선택과 순종을 위한 호흡
호흡을 멈춘 사람이 무엇을 먹을 수 있겠는가? 물 한 모금도 삼킬 수 없다. 호흡을 멈춘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그 몸을 더욱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숨 쉬는 자는 먹으면 먹을수록 그것이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다. 호흡이 되고 난 다음에, 선태과 순종을 감당하여, 주님의 뜻대로 인생의 회복과 부흥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했다. 사무엘은 그 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후에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현장 사역은 끝났어도 기도사역은 계속했던 것이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혼의 호흡,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기도로 삶의 문제를 해결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하고 계신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19) 7절 이 말씀을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하라!”이다. 다르게 말하면 기도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주님의 명령이다. 기도는 주님의 뜻이다. 기도를 명령하신 이유는 응답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응답을 전제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기도는 응답이 100% 약속된 것이다.
주님이 명령하신 기도의 내용은 기도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왜 구하라 하시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볼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기에 구하라 하는 것이다. 기도는 찾는 것, (seeking)이다. 왜 찾으라 하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이 좋은 모습을 회복시키시려고 기도를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은 기도할 때.
기도의 제목이 너무나 많다. 이 시대와 세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국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살고 있는 이 미국과 전 세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회복되어야 예배가 회복된다. 예배가 회복된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다. 기도가 회복된 사람은 마침내 축복의 순종을 위한 참되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성도는 기도할 때 온전해진다. 성숙해진다. 마침내, 다이나믹한 삶을 이 땅 가운데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davidnjeon@yahoo.com
05.28.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