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도 잘 준비된 사람이 좋은 열매를 거두듯이 신앙생활도 잘 준비된 사람이 기쁨을 누리고 마침내 승리하게 됨을 본다. 혹자 가운데 ‘나는 이만큼 준비가 잘 되어있는데 하나님이 잘 몰라주시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와 축복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준비된 자를 찾으신다. 엄밀히 말하면 직접 준비시키셔서라도 쓰시길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충성을 감당했던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나는 부족한데, 주님이 나의 능력 그 이상으로 사용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이다. 맞는 말이다. 주님의 능력이 함께할 때 공통으로 드러나는 신앙고백적인 언어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준비, 그 이상으로 사용
작은 경험을 이야기해보면 신학교에 처음 입학하고서 순전히 의리(?)로 교인 없이 개척하는 목사님 가족을 따라 우리 부부 두 사람과 여섯 명이서 개척을 했다. 3년간 대구에서 부산까지 통학을 하고 개척교회를 섬기다보니 공무원이었던 집사람이 생활비를 책임지면서 사역을 감당했다. 이것이 너무 힘들었던지 첫 아이를 유산하기도 하면서 3년을 지나면서, 이제는 규모 있는 교회로 옮겨서 행정과 목회전반을 배우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신 나머지 아이까지 천명되는 교회의 유일한 부목사 자리로 초임 강도사인 나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새로 부임하게 된 교회에 문제가 있었다. 부목사님의 신학사상이 조금 특별했었던 것이다. 성경에 손을 넣고 축도하라는 법이 없다면서 손을 들지 않고 축도를 감행한 것이었다. 결국, 부목사님은 잘렸고(?) 그 자리에 성경을 가지고 따지고 힘들게 하는 목사급이 아닌 새롭게 시작하는 강도사를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역이 너무 과중했던 것 같다. 거의 매일 밤 12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가는 강행군을 해야 했었고 몸과 마음이 지쳐가면서 본래 하고자 했던 유학을 다시 준비하게 되었다.
유학의 비전과 함께 그 내면에는 어려운 목회현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절반은 되었던 것 같다. 실제 담임목사님의 목회를 보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기관목사를 꿈꾸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면서 미국에서 한인이 2천명도 안 되는 곳에서 이민교회를 개척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개척에 대해서는 정말 1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고, 밀리고 밀려서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부딪히면서 하나님 앞에 항복 선언을 한 것이 개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이제 철이 조금 들어 세월의 연한이 조금 흐른 후에 가만히 돌아보고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준비과정 중에 이루어진 결과였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맨바닥에 헤딩하던 개척교회 3년과 2년 반 동안의 강도사 특별훈련을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아무래도 이민교회 한 곳에서 올해 20년을 목회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러한 믿음의 해석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특별한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을 본다. 더불어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주님 앞에 새롭게 담금질된 사상과 생각은 한가지이다. 준비된 만큼 주님이 쓰시기에, 주님 앞에 쓰임받기 원하는 이들은 어쩌면 평생을 준비하며 지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준비 중의 준비
준비된 만큼 쓰시는 분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준비해야 될 것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능력과 기술과 힘을 준비해야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주님이 이 마지막 종말시대에 원하시는 것은 ‘주님오실 날을 예비하며, 이 시대와 사상에 깨어있는 삶의 준비’를 가장 원하신다는 생각이다. 종말시대를 살아가면서 항상 질문해 보아야할 것은 ‘언제 주님 다시 오실지라도, 그 주님 맞을 일에 잘 준비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혼인잔치 비유도 ‘등불의 기름준비’ 여부가 슬기로움과 미련함의 기준이 되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의미하며 기름준비 잘하며 주를 기다리는 열 처녀가 교회 성도된 우리를 말한다고 할 때, 시대를 분별하며 주님 오실 날을 잘 예비함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의 때를 지나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정말 믿는 자를 내가 보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제대로 믿음 가지고 사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종말의 시대를 설명하는 말씀인 디모데후서 3:1-5을 보면, 마지막 때에 주님 맞을 등불을 밝히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모습을 말씀한다. 어느 하나라도 우리가 이에 부합되지는 않은 지 돌아보며 준비해야 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교만하며/훼방하며/부모를 거역하며/감사치 아니하며/거룩하지 아니하며/무정하며/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참소하며/절제하지 못하며/사나우며/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배반하여 팔며/조급하며/자고하며/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말세지말의 현상
이 시대는 말세 중에서도 말세임을 알게 한다. 말세를 표현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데, 오늘날은 이런 경건의 모양마저도 찾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자신의 직분이 ‘집사/권사/장로/목사 등’이라고 하면 직분 때문이라도 자리를 지킬 줄 알았는데, 오늘날은 그렇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싫으면 모든 것이 싫어지고 자신이 좋으면 모든 게 좋게 보이는 어린아이만도 못한 어린 아기 같은 신앙이 유행하기 때문이다. 싫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주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교회가 힘들어 하는 방향으로 결국은 그렇게 하고픈 대로 하더라는 것이다.
자기애(愛)가 지나친 것은 이기적인 교만이며, 마침내 주님의 책망을 받는 첩경이 될 따름임에도 사사시대처럼 그렇게 자신의 소견을 따라 삶을 경영해가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경건의 모양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세상이다, 돈 앞에서는 신앙도 없다. 부모도 형제도 부부도 없는 것을 본다. 최근, 한국에서 보험을 8개나 들어 두고는 수영 못하는 계곡물 속에 빠뜨린 아내가 있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그들뿐이겠는가? 돈의 힘 앞에서 무력해지는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본다. 장로이고 권사여도 비즈니스 문제가 닥치면 주일성수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져가는 것을 본다. 자신이 하고 싶으면 은혜이고 하기 싫은 것은 모두가 율법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 속에 없는 것 같다.
부모를 거역하는 시대이다.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무너뜨린다. 부모를 거역하는 시대의 특징은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자기 같은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아서일 것 같다. 만약에 자신들이 그렇게 효도하는 사랑스런 자녀로서 부모님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면 저들도 자녀를 생산하고 행복한 가정과 가문의 꿈을 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성경에 이르는 합당한 책임과 의무가 있지만 서로 책임지고 싶지 않은 악함이 저들 가운데 있음을 본다.
하나님 없는 하나님 신앙
또한 오늘날 시대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란에 기독교라 쓰지만 그렇게 쓰는 자신도 그것을 읽는 타인도 그 사람의 신앙은 단지 ‘기독교’일 뿐 진짜 하나님이 있음을 믿는 참된 기독신자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서로 서로 인정하며 지낸다는 것이다.
배우출신 장로와 권사 부부가 간증 프로그램에 등장해서는 은혜를 많이 끼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장로님의 딸이 술집 이름을 건 유튜브 방송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말들이 많았다. 장로님 집에서 술 광고 찍는 영상을 만들고, 그런 방송에 권사가 출연을 해서 술잔을 들이키는 딸과 함께 신나는 입담을 내어놓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이 의심스러웠다. 아 저분이 속한 교단에서는 장로와 권사 부부가 저렇게 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뜻인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된단 말인가?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며 돈을 벌거나, 다른 사람의 등을 치는 사기 도박 강도 등의 일을 통해서 수익을 얻는다면 천금을 번다하여도 천한 직업일 뿐이다.
착각과 오판
그러면 종말시대에 합당하게 준비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착각과 오해 때문이다. 설마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셨을까? 설마 하나님이 날 생명록에서 빼내었을까? 등등의 설마/설마 하는 삶의 방식이 종말시대 등불 준비를 막아버린 것이다. ‘설마, 설마’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 없는 미래’를 꿈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기름준비 없이도 미래의 신랑을 맞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미래를 볼 수 있다. 지금을 보면 훗날을 알 수 있다. 현재 어떻게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보면, 마지막도 어떻게 될지를 능히 알게 된다. 지금 나의 현재 모습속에 미래 나의 모습이 잉태되어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나의 미래를 품고 있는 시간이다. 언제나 기회가 있다고 오판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항상 순간순간 결단하는 것이다.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 오시는 그날 우리의 미래는 주님앞에 부끄러움 당할 일들 밖에 없을 것이다.
회색지대는 없다
현재, 자신의 무엇을 바꾸며 준비해야 할까? 우리 자신을 성경말씀의 기준에 맞추어 바꾸어 가야 한다.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치고 나를 바꾸어야 한다. 신앙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신의 원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
종말의 때에 두 갈래 외에는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기억해야 한다. 중간은 없다.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천국과 지옥만 있을 뿐 회색지대는 없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를 유혹하며 망하게 하는 설마 설마 하는 어리석은 신앙의 본질이다.
davidnjeon@yahoo.com
04.3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