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드리는 예배와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 가운데 듣는 것이 원칙이다. 말씀은 강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은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예배 가운데 말씀을 받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우리 몸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가장 편한 모습으로, 때로는 잠자리의 수면제로, 때로는 비상응급약처럼 도구적으로 이용하려해서는 말씀이 주는 좋은 유익을 놓치고 말 것이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 구별된 예배의 장소,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편안한 집안에서 예배를 나름의 취향(?)에 맞게 드리게 되면 하루에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사람들은 우선 집중해서 말씀을 듣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아까워서 한 번에 두세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연구가들이나 심리학자들은 “멀티태스킹”은 생산성이 떨어지고 우리가 원하는 두 배, 세 배의 효과를 볼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예배를 그런 멀티태스킹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결과적으로 예배라는 이름으로 설교방송을 듣는 것 같지만 실제 그렇게 잘 기억되지 못하는 행태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영적인 질병들이 이모저모 드러날 구조가 될 것이다. 교회에서 주시는 말씀에 집중하기도 어려운데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씀이 쏟아져 들어온다면 영양은 공급되는데 운동이 되지 않아 비만에 이르는, 마침내 질병이 유발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신앙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은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과 정하신 방법이다. 참 예배는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 정의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한시간, 정한 장소에 자신을 몸을 가져가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과 내용을 따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자기마음대로 드리는 예배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예배합니다”라고 자신의 예배관을 피력한다. 몸이 꼭 교회라는 빌딩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가? 그저 마음과 정성으로 드리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 영으로 예배를 드릴지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영혼을 담는 물질계로서 육체를 움직여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채 스스로 예배할 수 없다. 몸을 움직여야만 진짜 영으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다. 만일에 몸과 영이 분리되어 영으로만 예배가 가능하다면 죽은 자도 예배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이상한 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라. 예배 중에 늘 옆자리에 앉던 김 집사가 오늘 보이지를 않는다. 그런데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육은 없어도 그가 영으로 그 자리에 예배드리러 와 있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으로 그가 옆 빈자리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귀신이 와 있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영과 육이 분리되고 끝이 난다. 그렇게 몸과 분리된 영혼이 어떻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몸이 없이 어떻게 영으로만 예배드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정한 시간과 정한 장소에 몸을 가지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힘써 몸을 움직여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쓰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신앙은 몸으로 하는 것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으로서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이론을 가진 사상이 있다. 가현설(Docitism)을 주장하는 이단이다. 무엇 때문에 그 사상을 이단이라고 하는가? 그 사상은 예수님이 진짜 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 것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죽음을 부인하니 당연히 육체적인 부활하심도 믿을 수 없게 만든 악한 사상이다.
이처럼 모든 이단사상의 뿌리에는 육체의 삶에 대해서 진정한 거룩을 추구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다. 몸이 없는 예수를 믿겠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의 몸이 되어 오셨고 몸으로 사셨고 실제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뭐라고 말씀하는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생각과 입으로만 하는 것은 가짜이다. 예배도 몸으로 드리는 것이다. 온전한 예배는 마음만 아니라 몸까지 드리는 것이다. 예배와 믿음은 몸을 드림으로 증명이 된다. 사람들은 가치 있게 여기는 곳에 몸을 움직여 함께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첫째는 시간이다. 둘째는 몸이 가는 곳이다. 셋째는 물질이 쓰이는 곳이다. 모두가 몸으로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열매인 것이다.
교회로 몸이 오는 것이 신앙
가끔 그런 성도님들이 찾아온다. 어떤 이유로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목사님. 제가 이사를 가는데 몸은 멀리 가더라도 마음은 항상 여기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께 마음은 두고 갑니다.” 그러면 재빨리 답을 한다. “집사님, 마음은 필요 없고 몸만 이곳에 있으면 됩니다.” 왜 그런가? 몸이 있으면 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가니까 마음도 가는 것이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마음만 멀리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주일에 골프를 치러 가야하는데 핑계가 좋다. “목사님, 제가 여기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 골프장만 생각하고 목사님 설교는 안중에도 없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골프장 가서도 마음을 다해서 이 예배의 자리를 지극 정성으로 사모하는 것이 좋습니까?” 그때도 단호하게 말한다. “마음은 필요 없습니다. 몸만 이곳에 있으면 됩니다.” 몸이 오면 마음은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교회에 오는 것이 진짜 예배이다.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손과 발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여 예배당에 와서 앉아서 예배드려야 한다. 그렇게 교회에 몸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천국을 사모하는 유한한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며 큰 은혜이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회를 사랑하고 늘 교회에 붙어서 기도를 많이 하시던 분이 천국에 가시고 나면, 그 분이 늘 앉았던 그 자리는 바라보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 은혜의 빛이 머무는 것을 본다. 천국가신 그분이 그립고, 천국에서 만날 날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몸을 붙이고 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특별한 예수의 향기를 진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생활 참 잘했구나! 하는 사람들, 참 인생을 잘 살았구나! 하는 사람들의 아주 공통적인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교회를 섬기면서 그 사랑을 증명하고 몸을 드려 눈에 보이는 주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 최첨단 인터넷 시대를 지나면서, 이것이 많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교회가 무엇인가? 흔히 교회론 성경공부의 첫 번 질문일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단 한 가지의 개념으로 단정하여 말한다. ‘세상가운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맞는 말이지만, 구원론의 측면에서 전도를 위해 더욱 강조했던 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교회를 그저 ‘구원받은 사람만 있으면 교회이지, 장소와 시간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 같다.
주님은 무엇이라 하실까?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이 밀어닥치고 비대면 영상예배가 활성화 되면서, 이 사상에 기초한 교회에 대한 관점들이 정말 엄청난 속도로 교회와 예배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구별된 시간과 장소가 아니어도, 정한 시간과 정한 장소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팽배해간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다고 했는데, 어디서나 예수님 믿는 성도 몇 몇이 모여서 예배하면 그것이 교회이지, 교회가 별것인가? 라는 생각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개척도 아주 수월(?)해졌다. 아무 곳이나 장소를 정하고 사람들이 친목 모임하듯이 모여서 찬송하고 누군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설교할 수 있다면 교회가 되는 것인가. 거기서 더 나아가 굳이 땅의 장소가 필요할 이유가 무엇인가? 온라인 가상공간도 가능하지 않은가? 하면서 몸 없는 교회, 몸 없는 예배로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잘못된 종말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아버지의 집이다. 아무 곳에서나 한번 해치우듯 드려지는 예배에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이 있을 수 없다. 우리 하나님은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나오는 그런 심부름꾼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두세 사람이 모이고 그곳에 주님의 임재가 있으면 얼마든지 어느 곳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관점을 통해 드러난 열매들이 무엇인가? ‘교회 예배당 무용론’으로 그 열매가 악하게 드러난다. 더 나아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듣게 되는 설교 말씀도, 굳이 사람 목사가 앞에 없어도 인터넷으로 누군가를 선택해서라도 들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거침없는 불신앙의 소리들까지 쉽게 내어 뱉을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가진 이들이 놓치는 것이 무엇인가? 두세 사람이 모여 예배하는 것을 교회라고 한다면, 우리 몇 십명, 몇 백명, 몇 천명이 모여 예배하는 이곳은 얼마나 더 구별되고 중요한 장소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불어 과연 임의의 장소에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몇 명이 모여 인터넷 설교를 틀어놓고 그것으로 내가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는 시대에 대해, 우리 주님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과연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될 수 있을까? 말씀을 나의 기호에 따른 선택을 따라 듣는다면 그것이 과연 나의 영혼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수 있고,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발의 등불과 인생행로에 합당한 빛이 될 수 있을까?
davidnjeon@yahoo.com
04.09.2022